1월 17일 오리엔테이션을 마치고 1월 18일 근무를 시작한 지 이제 삼 주째 접어든다. 오리엔테이션에서 들은 소식은 아직 백그라운드 체크가 끝나지 않아 출근일정이 늦춰질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약간의 실망감이 들기도 하였지만, 당시 호스텔에 머물며 숙소를 알아보고 있었기에 하루라도 더 시간을 벌어 숙소를 찾아볼 수 있다는 생각에 안도감 역시 주는 소식이었다.
그렇지만 첫 출근은 예정대로 이루어졌다. 18일 아침 호스텔에서 주는 팍팍한 빵을 먹다가 출근해도 된다는 이메일을 받고 곧장 사무실로 향했다. 구겐하임미술관 직원들은 교육 및 미술관 프로그램, 시설 관리에 필요한 직원들을 제외하고는 맨하탄의 업타운의 미술관이 아닌 다운타운, 허드슨 345번지 사무실로 출근한다. 나는 아시아 미술 큐레이터 부서 소속으로 나의 책상은 큐레이터 부서의 한쪽에 마련되어 있었다. 내 옆자리에는 펠로우로 지난해 가을부터 근무해온 린이 자리하고 있다. 나는 린으로부터 간단한 사무실 구조와 부서별 위치, 인트라넷이나 이메일 사용방법 그리고 업무에 필요한 전반적인 매뉴얼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익히 들었던 것처럼 회사에서건 거리에서건 모두들 바쁘고 자기 일에 열중할 뿐 남의사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는 뉴욕커라는 말이 새삼 떠오르는 풍경이었다.
수요일에는 원래 4시에 부서 전체 회의가 있단다. 아시아 미술 큐레이터 부서는 미술관의 핵심을 이루는 큐레이터 부서의 일부이며 동시에 독립된 부서로서 기능한다. 2006년 나의 슈퍼바이저이자 이곳의 시니어 큐레이터인 알렉산드라 먼로 씨가 큐레이터로 영입되면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큐레이터 부서보다는 인원이 적지만 그 의욕은 대단하다. 부서는 알렉산드라 이외에 협력 큐레이터인 산드히니가 중심을 이룬다. 그리고 내 옆자리에 앉는 펠로우 린은 알렉산드라와 산드히니의 큐레이터 관련 일들을 실무선에서 협조한다. 이밖에 뉴욕대학 석사를 졸업하고 지난 9월부터 인턴을 시작한 사오리, 그리고 콜롬비아 대학 박사과정에 재학 중으로 인턴이라기보다는 연구생으로 특별대우를 받는 알렉스가 있다. 이제 내가 더해졌으니 모두 여섯 명. 알렉산드라가 한국국제교류재단 소속 인턴으로 친절하게 나를 소개하며 내가 한국에서 해왔던 일이나 이곳에서의 포부 등을 자세히 소개해 보란다. 보통 내 소개를 하라면 이름만 말해버릴 텐데, 이제 이곳에서는 한국국제교류재단 파견 인턴이니 입을 닫아버릴 수도 피할 수도 없는 나는 얼굴이 붉어져서 더듬더듬 내 소개를 했다. 일단은 이미 부서 직원들이 한국국제교류재단에서 파견 온다는 것을 잘 인식하고 있었고, 그들의 태도 역시 일반 인턴보다는 더 존중을 해주는 느낌을 주었다.
어찌됐건 당장 3월 2일에 새로운 전시가 오픈이라 부서는 정신없이 바쁘다. 그러하니 오늘 도착한 인턴이라고 봐주고 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회의 후에는 본격적으로 오픈하는 전시에 대한 업무의 일부가 주어졌다. 나는 우선 린이 그동안 해온 일들을 인계 받아서 2월 중순 전시를 위해 입국하는 작가들의 숙소와 비행기 티켓을 알아보고 에이전시와 새로운 담당자와 인사를 나누는 것부터 시작하였다. 그 이후로 지금도 넉넉하지 않은 예산에 작가들이 그럭저럭 만족할만한 서블렛(단기간 방을 임대하는 방식으로 집값이 엄청난 뉴욕 등지에서는 이런 방식의 하우스, 아파트 임대가 일반적이다.)을 찾아보고 있다. 아직 뉴욕의 지리가 익숙하지 못한 나는 사실 작가들의 숙소를 알아보러 부동산 중개인과 연락하고 집을 보러 다니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지하철 타는 것도 배우고 새로운 동네도 가보고 아파트도 구경해 본다. 답답한 사무실을 나와 그렇게 잠깐 바람을 쏘여주고 돌아오면 다시 문서 업무들이 남아있다. 말 그대로 인턴의 업무이다. 예를 들어 지난 2008년 전시 준비과정에서 모아진 작가 리서치나 관련 자료들이 쌓여있는 것을 분류하여 아카이브실에 등록하는 것도 내 업무였다. 물론 호기심에 서류를 들춰보고 읽어보기도 하지만 시간에 쫓기다 보니 우선 필요한 자료만 급하게 정리하여 넘겨버리는 게 일상이다. 아울러 1월말부터 2월초까지 한국, 일본, 홍콩으로 비즈니스차 여행을 가있는 알렉산드라의프리젠테이션이나 일정, 스케줄 관련 서류 준비를 돕는 것도 내 역할이었다.
지난 2주간 한 업무들은 한국에서 인턴들이 하는 업무와 같이 자잘한 것들이 너무 많아 사실 하나하나 헤아리기도 어렵다. 2월은 갈수록 바쁜 달이 될 것이라고 3월 전시의 큐레이터인 산드히니는 미리 겁을 준다. 당장 2월 중순에 인도 작가들이 작품 설치를 위해 입국하면 자잘한 그들의 요구사항을 따라주는 것, 교육이나 전시 관련 부대행사나 프로그램의 진행과 협조도 내 업무가 될 것이다.
한국에서 제대로 인턴과정을 밟아본 적이 없는 나는 사실 인턴의 업무가 그다지 싫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난날 내가 인턴들에게 업무를 주었던 방식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며 효율적으로 고쳐야 할 부분도 생각해 보게 된다. 낯선 이곳에서 생활은 나에게 단순히 업무 경력을 쌓는 기회가 아니라 또다른 삶의 방식을 경험하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