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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의 사명

솔직히 내가 한국에 대해 가졌던 태도는 결코 단순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옛 소련 시대 이후 모든 한인 동포(고려인)와 마찬가지로 언어 장벽으로 인한 한국 문화에 대한 얕은 지식 때문에 한국과 단절되어 있었다. 나는 평양에서 태어났다. 북한 시민이었던 아버지는 소위 흐루시초프 시대의 해빙기(자유화) 시절 레닌그라드에 유학하면서 소비에트 한인 동포였던 어머니를 만나 결혼했고, 대학 졸업 후 어머니와 함께 귀국했다. 소련 시민에 대한 정치적 박해가 시작되자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소련으로 되돌아왔는데, 그때 내 나이 겨우 한 살이었다. 그 결과 나와 한국의 끈은 끊어졌지만,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억누를 수 없었다. 이런 인연으로 지난 2008년 수많은 경쟁을 뚫고 한국국제교류재단의 체한연구펠로십에 초대받을 수 있었다. 나의 연구는 CIS 한인 동포의 문학과 잃어버린 정체성 탐구를 주제로 책을 쓰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나 기뻤지만 동시에 걱정과 불안이 앞섰다. 이런 복잡한 심정은 서울로 오는 비행 내내 나를 괴롭혔다.



활력을 선사한 청계천 , 딸과 함께한 즐거운 한국 여행
문학이라는 비실용적인 일을 추구하는 나는 다른 모든 면에서는 지극히 실용적이다. 이것이 나의 원칙이다.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모든 동요를 떨쳐버리고 일에만 집중했다. 글 쓰는 작업에서 성공의 열쇠는 무엇일까? 물론,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질서정연한 일과에 있다. 우선 광화문에 있는 한국국제교류재단 숙소에 자리를 잡은 뒤 아침에 달리기를 할 수 있는 곳을 찾기 시작했다. 사실 아침 달리기는 항상 나의 일과에 효율을 높여주었다. 드디어 아침 달리기를 할 장소를 찾아냈다. 청계천은 글자 그대로 내 서울 생활의 동맥이었다. 그곳을 약 5킬로미터 정도 조깅하면 항상 활기차고 창조적이며 활발해질 수 있었다. 러시아어를 쓰는 한인 동포 작가의 책을 50여 권 가지고 왔던 나는 일에 파묻혔다. 그리고 한 달 뒤 작업 리듬을 찾고 안정되었다. 그때부터 다양한 재단 행사, 대학에서 하는 포럼, 작가와 번역가의 세미나 등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동료와 어울리고, 서울과 전국을 여행하며 관광객의 즐거움도 발견했다.
11층에 자리한 숙소의 창문 사이로는 도시의 아름다운 전경이 펼쳐졌다. 어느 휴일, 눈을 감고 산 정상에서 나의 전 생애를 먼 과거에서 현재, 미래까지 내려다보는 것처럼 느껴보았다. 그리고 지난 20년간 몰두했던 문학 작업이 삶의 주요 의미며, 나를 정당화하는 것임을 분명히 이해했다. 나를 포함해 창조적인 작품을 집필했던 작가들은 문학을 통해 진정으로 고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몹시 힘들었지만 흥미진진한 작업을 하는 동안 겨울, 봄, 여름이 지나갔다. 8월에는 딸이 한국에 왔다. 딸의 방문은 한국 체류 생활에서 최고의 순간이 될 것이라 확신했다. 그동안 나는 집필 때문에 모범적인 남편과 아빠가 되지 못했다. 아내와 딸은 수년 전 영국으로 갔고, 우리 가족은 서로 떨어져 지냈다. 오랜 시간 가족을 보지 못했기에 딸의 방문은 내게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딸아이는 한국에 대해 어떤 인상을 갖게 될까? 내가 보여주는 것을 모두 좋아할까? 나는 책을 쓸 때보다 더 많은 걱정을 했다.
딸이 도착하면서 다채로운 생활이 시작되었다. 거대한 도시, 서울의 관광지를 매일 찾아 다녔고 부산, 경주, 동해안 등 전국을 여행했다. 딸은 무엇보다도 한국 음식과 따뜻하고 인정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 딸아이는 한국의 고색창연함과 절, 자연, 산, 바다, 잘 다듬어진 도시와 농촌을 좋아했다. 그렇게 8월은 순식간에 지나갔고, 헤어질 시간이 다가 왔다. 딸은 앞으로 한국 문화에 대해 배우겠다는 새로운 다짐을 안고 런던으로 떠났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기뻤다. 그것은 이번 여행이 성공적이었음을 뜻했다.

행복한 집필 그리고... 자유로움
9월이 시작되었다. 나는 별 어려움 없이 다시 일에 몰두할 수 있었다. 이런 경우, 늘 그랬듯 책은 술술 쓰였고 나는 단지 그것의 얌전한 실행자일뿐이었다. 11월 초, 그동안 전념했던 작가로서의 여행에 끝내 마침표를 찍었다. 체한 기간이 끝나려면 두 달이 남아 있었다. 행복한 시간이 이어졌다. 책을 끝낸 뒤 나는 최고의 자유를 만끽했다. 나의 책은 유명한 고전인 서자 홍길동의 이야기를 보고 구상한 것이었다. 그 구상은 다음과 같다.
한인 동포 작가는 모두 러시아판 홍길동이다. 정통이 아니고, 버림받았으며, 고국도 없었다. 그들은 21세기 해외 한인 디아스포라의 진정한 이미지를 재건하겠다는 목적으로, 문학을 통해 소련 체제의 민족적 전형에서 탈피해 반항했다. 잘 알려진 대로 이야기의 끝에 가면, 개인적 존엄을 쟁취하려던 용감한 홍길동은 율도국이라는 환상의 나라에서 고국을 찾는다. 그곳에서 그는 고결한 통치자로 가족, 친구, 헌신적인 전우들 속에서 행복하게 살아간다. 이 책에서 나는, 한인 동포 작가들은 정확히 자신의 작품 속에서 고국을 찾았으며, 그 속에서 적대적인 외부 현실과 정반대인 독창적이고 훌륭하며, 공명정대한 세계를 만들어 냈다고 썼다.

우리가 함께 만들어야 할 사명
한국에서 1년을 보내며 이 나라가 얼마나 역동적으로 발전하고 있고, 사람들이 얼마나 개방적이고 긍정적이며 활기찬 지를 보았다. 우리가 어디에 살고 있건 모든 한인은 각자 자신의 일을 통해 개인의 이상과 원칙, 가치에 꼭 들어맞는 율도국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나는 펠로십 프로그램 덕분에 한국에 체류하면서 책을 완성한 일 외에 또 어떤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 내가 태어난 평양과 200킬로미터 떨어진 서울에서, 나 자신의 극적인 가족사를 생각하면서 고국에 살고 있건 그 경계를 벗어나 있건 우리 모든 한인은 우리를 갈라놓은 한국사에 존재하는 수많은 정치적, 심리적, 사상적 장벽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간단하면서도 동시에 복잡한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그 장벽을 넘어서야 한다. 그것은 바로 어떤 상황에 있건 우리는 하나고, 하나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오로지 마음으로 이해하면, 우리가 공동으로 추구하는 것을 실행에 옮길 수 있다. 또 고유한 역사적・인간적 경험과 우리의 다양한 재주와 능력을 펼칠 수 있다. 한인들의 세계관을 창조하고, 한민족에 대한 보다 높은 의미를 역설하고, 한민족을 유지하며, 새로운 정신적・전문적 정상을 쟁취하는 데 우리공동의 사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