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아한 무대, 정갈한 연주가 관객의 마음을 정화시켜
장구와 방석만이 정갈하게 놓여있는 고요한 무대. 자리를 잡고 앉은 관객들의 소란스러움이 잦아들자 백발의 황병기 선생이 흰 두루마기를 입고 걸어 나왔다. 곧, 우아한 학과 같은 분위기의 노(老)예술가의 연주가 시작되었고, 그의 손끝에서 청아한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하자 국악당 내의 모든 귀와 눈은 가야금으로 모아졌다. 여리지만 힘이 있고, 가늘지만 진중한 소리가 흘러나온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가락에 어느덧 맘이 빼앗기고, 화려한 손놀림에 눈길이 닿는다. 이렇게 몇 분여에 걸친 황병기 선생의 ‘침향무’ 연주가 끝나자 큰 박수소리가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던 남산국악당 실내를 가득 메운다.
2011 한국국제교류재단이 마련한 이번 공연은 주한외국인을 위한 여름 정기 음악회로, 동서양 현의 노래를 주제로 황병기 선생을 비롯한 현과 목관악기 7중주의 연주로 이뤄졌다. 주한 외국인들에게 낯설게만 느껴질 한국의 소리를 제대로 알리고 싶다는 취지대로, 많은 외국인들이 참석해서 자리를 빛내 주었다.
전통적이면서도 독특한 황병기 명인의 가야금곡
이날 그들을 맞아 연주를 하게 된 한국의 대표적인 가야금 연주자인 황병기 선생은 사실, 한국에서는 더 이상의 소개가 필요 없는 가야금계의 거목이다. 이날 소개되었던 5곡의 곡들은 모두 황병기 선생이 작곡한 곡으로, 전통적이면서도 전위적인 작품들로 구성되었다. 황병기 선생은 그의 첫 곡 ‘침향무’를 마치고, 겸손하게 인사를 한 뒤 직접 가야금과 장구에 대해 간단한 설명을 곁들였다.
1천 5백여 년 전에 우리나라 가야국에서 만들어진 악기, 가야금. 연주자의 무릎에 올려놓고 손으로 직접 뜯어 연주하기 때문에 탁자에 올려놓고 연주하는 중국의 가야금이나, 골무를 끼고 연주하는 일본의 가야금(고토)보다 연주자의 마음을 좀더 섬세하게 전한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황병기 명인은 한국 가야금의 판은 오동나무로, 현은 비단으로 만들며 특히 한국의 가야금은, 한국에서 자란 오동나무로 만들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제대로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설명마다 통역가가 명인의 이야기를 영어로 전달했는데, 통역가도 어려워하는 전문용어가 나오자 황병기 선생이 직접 영어로 설명하며 여유를 보이기도 했다. 명인의 여유와 위트에 전통을 대한다는 마음에 엄숙하기까지 하던 분위기가 금방 부드러워졌다.
고유한 멋 간직… 서정적이고도 화려한 선율
그 후 황병기 명인의 수재자인 지애리 씨의 ‘시계탑’과 기숙희, 안나래 씨의 합주 ‘하마단’, 그리고 바이올린과 함께한 ‘달하 노피곰’이 연주되었다. ‘어떻게 어울릴까’ 했던 바이올린과 가야금은 하나의 악기가 반주와 주제를 연주하면, 또 다른 악기가 멜로디를 담당하며 여리고 강하게, 이끌고 뒤따르며, 때론 받쳐주고 띄워주면서 아름다운 하모니를 연출해냈다. 그리고 동서양 현의 하모니의 아름다움은 마지막 곡, 새봄에서 절정을 이뤘다. 현과 목관악기 7중주와 함께한 가야금 연주는 퓨전이라기 보다는 동서양 고유의 ‘멋’이 섞이지 않고, 그대로 드러나면서도 조화로운 연주라는 점에서 참석한 외국인 관객은 물론, 국내 관객들에게도 새로운 감흥을 전해 주었다.
이날 연주회는
이라는 주제처럼 동서양이라는 차이점을 가지고 있지만, 현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 악기들의 소리가 서로를 배려하면서도 어떻게 아름답게 어우러질 수 있는가를 알려준 뜻깊은 무대였다. 연주가 모두 끝나자 열정을 다해 연주해준 황병기 명인과 그의 제자들, 그리고 7중주 단에게 쏟아지는 박수 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따뜻하고 감동적이었다. 이번 연주회는 국제교류재단이 한국에 머무는 외국인을 위해 지난 2003년부터 매년 한 차례씩 열어온 음악회로서 그동안 국악이나 퓨전국악ㆍ재즈ㆍ세계음악 등이 연주되어왔다.
황병기 명인
서울대학교 법학도였던 그는 국립국악원에서 가야금을 배워 서울대학교 에서 국악과가 창설되는 것을 계기로 강사로 강단에 서게 되었다. 대학에서 인재육성에 힘쓰는 등 한국음악계에 지대한 공헌을 하는 한편 뛰어난 연주가, 작곡가로서 1965년 국악상, 2006년 대한민국예술원상, 2010년 후쿠오카 아시아문화상 대상 등 명예로운 상을 다수 수상하며 국내외의 높은 평가를 받는 동시에 전통음악 창작의 선각자로 존경 받는 인물이다.
가야금
가야금은 한국의 대표적인 현악기로 오동나무로 만든 판 위에 명주실을 꼬아 만든 줄을 기러기 발 모양의 안족(雁足)에 얹어 놓고 손가락으로 뜯거나 퉁겨서 소리를 내는 악기이다.
장구
장구는 일종의 양쪽을 치는 북이라 할 수 있는데, 허리가 가늘어 세요고(細腰鼓) 또는 장고(杖鼓)라고 한다. 장구는 민요, 농악 등 쓰이지 않는 곳이 없을 만큼 우리나라 전통음악에 두루 쓰이는 악기이다.
최경숙 자유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