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
유럽에서 온 한 작가는 아시아를 ‘공사 중’이라 표현했다. 수백 년의 역사를 가진 거리에서 백 년 정도씩은 된 건물에서 살고 있는 그들로서는, 끊임없이 새로운 건물이 지어지고 낡은 건물이 사라지는 서울을 비롯한 아시아의 대도시의 역동적인 분위기가 조금 위협적이면서도, 유럽의 고도에는 없는 활기와 에너지로 느껴진다고 말한다.
시간이 멈춘 듯한 도시와 달리 유기체처럼 끊임없이 변화하는 도시에서 생활한다는 것은 한편으로 다양한 문화적 자극을 받을 수 있는 즐거운 일이지만, 다른 한편 익숙했던 것들을 놓아 보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렸을 때 살던 집, 아이 때 걷던 골목길, 친구들과 놀던 놀이터 등이 도시의 재개발과 확장 속에서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개인의 사적 공간들뿐 아니라 거리의 풍경도 변한다. 서울 청계천의 풍경이 완전히 바뀌었고, 베이징 올림픽 전후로 베이징의 거리도 새로워졌다(또 지금도 새로워지고 있다). 도시의 변화와 개발은 경제적으로는 이윤을 산출해내겠지만, 예술가들은 변화 속에서 잃어버리는 것들에 대해 주목한다.
감성을 관통하는 이미지의 힘
동아시아 현대미술을 소개한 ‘그리움, 동아시아 현대미술전’은 발전과 변화를 향해 달려오면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서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전시장 입구에서 타이완 작가 투웨이청의 흑백 사진들은 사람들로 서울 시내 여러 공간의 규모를 잰다. 그 속에 생활하는 사람들의 삶의 질과는 무관하게 더 높고, 더 넓은 공간이 위용을 자랑하는 현대 도시에서 인간적인 삶의 공간, 그 규모와 사람들 간의 거리를 드러낸다. 분명히 여러 번 지나다녔을 텐데도, 어딘지 알아보기 힘든 사진들은 작가가 직접 돌아다니면서 ‘채집’한 서울의 이미지들이며, 그것으로 만든 ‘이미지 은행’은 낡은 약장의 서랍을 열어, 사진 속의 공간을 찾아 인증샷을 가져오면 금빛 액자에 담긴 사진을 선물 받는다. 우리의 도시를 대상으로 한 일종의 숨은그림찾기와 같은 이 작품은, 무심히 지나갔을 공간들의 소소한 아름다움과 의미가 드러내 준다.
설치, 회화, 영상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이 선보인 이번 전시에서 특히 흥미로운 사진 작품들이 많이 소개됐는데, 그 중 눈길을 끈 것은 언뜻 어느 집 사진첩에나 있을 법한, 사진관에서 어색한 자세로 촬영한 기념사진을 보여주는 중국 작가 하이보의 ‘그들(They)’이었다. 1960~70년대에 친한 친구들끼리, 또는 형제끼리 모여서 그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서 촬영했을 사진들의 주인공들을 다시 수소문해서 촬영한 사진은 그들의 과거와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수줍은 소녀는 중년의 여인이 되었고, 세상을 떠난 사람들 때문에 생긴 빈자리가 쓸쓸하다. ‘그들(They)’은 함께 했던 과거에 대한 그리움과 동시에 그들을 변하게 만든 세월과 그간의 녹록지 않았을 삶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익숙해지면 쉬워져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나이를 먹을수록 오히려 삶은 더 어려워지는 탓인지, 사진 속 인물들의 표정은 무겁다. 하이보의 사진과 립스틱, 낡은 구두 등 작가의 어머니가 쓰던 물건들의 사진을 담은 이시우찌 미야코의 사진은 롤랑 바르트가 말한 푼크툼, 즉 우리의 감성을 직관적으로 뚫고 나가는 강력한 이미지의 힘을 체험하게 한다.
추억이 반겨주는 시간여행
각 연도마다 인기곡을 들으면서 ‘사랑’에 대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책 『향연(Sympisium)』을 읽을 수 있는 구민자의 작품에 머무는 시간도 이 전시에서 놓칠 수 없는 즐거움이다. 지금은 다들 식탁과 소파로 이루어진 서양식 입식 문화가 도입되었지만, 과거에는 신발을 벗고 바닥에 앉는 문화가 있었다. 멍석 위에 편하게 앉아 추억 속의 노래와 함께, 누구에게나 있을 과거의 사랑과 그때의 기억들에 대한 이야기를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저마다의 추억 속으로 시간여행을 떠나게 된다.
시골집 마당의 빨랫줄 풍경, 계절에 따른 자연의 변화가 담긴 풍경화까지 어우러진 ‘그리움, 동아시아 현대미술전’은 우연히 마주친 고향 친구처럼, 오랜만에 찾은 어린 시절 교정처럼 우리를 반겨주었다. 그리하여 새것을 동경하고 찬탄하는 문화 속에 적응하기 위해서, 나약해지지 않기 위해서 애써 묻어둔 감정인 ‘그리움’을 다시 마주하게 한다.
이수정 아트센터 나비 전시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