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메뉴 바로가기본문으로 바로가기

시대를 앞선 문명, 카르타고

튀니지 엘마나르 대학 무하메드 판타르(M’hamed Fantar) 교수가 한국과 튀니지의 학술교류 증진 방안을 모색하고자 지난 5월 1일부터 8일까지 7박 8일 일정으로 한국을 찾았다. 고대문명 및 종교학의 세계적인 석학인 판타르 교수에게 카르타고의 문명에 대해 듣는다.

고대 카르타고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우선 그리스, 라틴 등의 고대 문서를 통해 카르타고의 문명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또 발굴된 유물들에서도 카르타고 문명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무덤이나 묘지 또는 건축물, 작업 도구, 보석 가공품, 질그릇 등 여러 다양한 유물들을 통해 우리는 카르타고에 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카르타고의 정치, 농업, 산업
카르타고의 정치제도는 선거에 의한 민주주의 체제였다. 그리스의 철학자는 카르타고의 헌법은 그리스 도시의 헌법보다 한 수 위에 있다고 말한다. 카르타고의 헌법이 귀족과 국민, 중간계층의 미덕을 한데 모아 균형을 이루고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카르타고의 헌법은 국민의회와 상원을 포함하고 있다. 행정부는 ‘사브드’라고 불렸는데 이는 카르타고 어로 ‘판사’라는 뜻이다. 이렇게 카르타고 헌법은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를 아우르고 있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또 정부는 선거를 통해 구성되었다.
카르타고 인들은 농업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고 특히 올리브, 포도, 무화과, 벼, 석류 등 열매나무를 심는 데 주력했다. 기원전 4세기 마준이라는 카르타고 학자가 농업 백과사전을 지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카르타고 인들은 도자업, 광업, 보석 가공업 등 여러 산업에 종사했다. 카르타고 인들은 카르타고 서적에서 확인할수 있듯 산업 기술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카르타고 상인들은 공격적인 마케팅을 하고 단골을 확보하는 데 일가견이 있었으며, 모든 지중해 연안 국민과 연결할 수 있는 배도 가지고 있었다.
카르타고 인들은 탐사를 위한 항해를 지원하기도 하였다. 카르타고인들의 지원으로 해군 대장 하눈은 지중해를 거쳐 지브롤터까지 항해했으며 대서양 연안에서 카메룬까지 갔다가 카르타고로 돌아왔다. 이는 금길을 찾는 항해로, 기원전 5세기경의 일이었다. 또 5세기경 해군 대장 카이밀크 또한 국민의 지원으로 지중해를 거쳐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북쪽으로 향해 현재의 영국까지 도달했다. 이는 당시 카르타고의 발달된 해군의 수준을 잘 보여준다.

시민적이고 개방적인 사회
카르타고 사회는 문명이 발달한 시민적이고 개방된 사회였다. 경제적 능력, 사회적 위치, 정치적 영향력을 지닌 각기 다른 계층이 공존하는 생동감 있는 사회였다.
카르타고 사회는 시민, 외국인, 노예의 세 계급으로 분류된다. 국민은 자산과 문화 지식에 근거해 자유와 시민권을 누렸으며 사회와 국가 건설에 기여하고 정치적, 행정적, 종교적 의무를 다하였다. 부유층이 이 중 사회의 중심으로 떠올랐으며 경제, 정치, 종교, 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중대한 역할을 했다. 또 그들은 산업, 상업, 농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업을 하며 여러 항구와 지중해 시장에서 분배된 물건들로 큰 수익을 얻으면서 영향력을 키워 결정권을 장악했다. 수공예업자들은 중간 계층으로 분류되었고 상업, 대장간, 보석, 장식품, 도자기 등 다양한 산업에 종사했다.
카르타고와 포에니 대도시들에는 그리스 인, 이집트 인,이베리아 인 등의 지역사회가 존재했다. 그들은 자국을 떠나 아름다운 도시인 카르타고로 향했다. 그들 중에는 공장이나 항구에서 일자리를 얻은 사람도 있었지만 많은 사람은 실업자와 노숙자가 되었다.
그리스 인과 이집트 인 등 일부는 카르타고에서 체류하면서 직업을 갖고 있었으며 일부는 상업에 종사했다. 주목할 점은 이들이 정치적, 사회적, 형사적 억압을 피해 그들의 나라를 등지고 카르타고로 피난을 왔다는 것이다. 카르타고 사회는 여러 계층이 공존하는 개방된 사회였고 외국인도 모두 융합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노예제도와 여성의 지위
고대사회에서 노예제도는 일반적인 것이었지만 카르타고의 노예는 인권이 있는 인간으로서 취급되었다. 사원에 출입해 신에게 의무를 다할 권리가 있었고 결혼의 권리, 잃어버린 자유를 사기 위해 돈을 모을 권리가 있었다. 이런 노예해방 과정은 법에 따라 결정되었다.
여성은 정치활동에는 참여하지 못했지만 종교와 경제활동에는 참여했다. 카르타고 서적에서는 여성으로서 사제의 역할을 하는 여성을 언급하고 있다. 또 사제의회를 이끌 수도 있었다. 카르타고 여성은 국가의 감정으로 대변되었다. 고대 문서에서는 대 로마전쟁 동안 카르타고 여성들의 용맹성을 묘사한 대목도 찾아볼 수 있다. 전쟁 기간에 함대와 줄총에 필요한 끈을 만들기 위해 여성들은 머리카락을 잘랐다. 사실 카르타고는 알리사 또는 디도라고 불리는 여성에 의해 건립된 도시이다. 대부분 도시 건설은 남자에게 그 공이 돌아간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카르타고 여성의 높은 사회적 위치를 알 수 있다. 튀니지 여성이 오늘날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갖고 있다는 사실은 여기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문명의 전파
카르타고 인들은 모두 모여 신들에게 경배를 했다. 그들은 바알 함문과 그의 부인인 타니트를 믿었으며 카르타고 인들은 이 두 신의 사원인 투파 사원을 찾아 돈과 제물, 선물을 헌납하였다. 이들은 바알 함문과 타니트에게 인사한 후 자신들의 이름을 적은 비석을 세웠다. 투파 사원의 독특한 점은 어린 나이에 죽은 아이를 화장해 사원에 묻는 풍습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바알신이 원한 것으로, 어린아이를 잃은 가족은 신에게 아이를 바쳐 그 보상을 받았다고 한다.
카르타고 문명은 무형적, 유형적으로 매우 발달하여 사르다나와 시칠리아 남부 에스파냐 등 지중해 여러 국가에 문명을 전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지중해 서부에 알파벳을 전파하는 데에도 기여했다. 페니키아 인들이 그리스 국가에 알파벳을 도입했고 이 알파벳은 현재 아랍, 유럽, 미국 등 여러 국가에서 쓰이고 있다. 이 모두가 페니키아 문자에서 따온 것이다. 카르타고는 이 문자의 전파 거점이었고 이는 지중해 여러 국가에 학문과 지식을 전파하는 데 기여했다.
알파벳은 지식 민주주의의 기본이다. 글을 쓰는 것은 그전에는 소수의 부유한 이들이나 종교인들만의 전유물이었다. 한 예로, 파라오 시대에는 기호가 많은 이집트 글자를 습득하는 데 긴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가난한 이들은 배우기 어려웠다. 그래서 페니키아 인들은 22자가 넘지않는 알파벳을 발명했고 훗날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모두 쉽게 배울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 같은 글쓰기의 확산으로 문학과 철학, 신화 읽기도 널리 확산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