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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북소리는 저 멀리 카스피 해를 넘어서

채향순 중앙무용단은 뜨거운 사막의 나라 ‘투르크메니스탄’과 바람의 나라 ‘아제르바이잔’의 열악한 공연 환경 속에서 최고의 무대를 선보였다. 말은 통하지 않아도 세계 공통언어인 ‘춤’으로 마음이 통할 수 있었던 공연 현장의 모습을 채향순 중앙무용단 단장이 전한다.

인천공항을 출발, 터키를 거쳐 장장 하루 만에 도착한 투르크메니스탄. 막중한 공연 장비와 개인 수하물 정리 그리고 입국수속을 마치고나니 제일 먼저 눈에 보이는 것은 주 투르크메니스탄 한국대사관 대사님 및 임직원 일동이 들고 있는 ‘축 환영 채향순 중앙무용단’이라고적힌 플랜카드였다. 이역만리 낯선 타향에서 우리와 같은 얼굴을 지닌 한국 분들이 이렇게 우릴 맞이할 줄이야. 코끝이 찡한 순간이었다. 공항에서 숙소까지 버스로 30여 분의 거리,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여러 모습들은 문득 예전에 평양을 방문했을 때의 느낌을 떠오르게했다. 일단 거리에 건물과 도로는 많은데 오가는 사람들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 것이 그랬다. 간혹 도로 곳곳에 경비를 서는 군인들만 보일뿐… 나중에 안 것이지만 그곳의 대형 건물 대부분이 국가 차원의 일종의 대형 전시물이었다. 숙소 체크인을 하자마자 리허설을 위해 ‘막툼굴리’ 극장으로 서둘러 이동했다. 극장에 첫발을 디뎠을 때 외부 구조는 물론 내부 구조도 상당히 좋은 모습으로 보였다. 그러나 깔끔하고 멋진 모습과는 달리 낙후된 조명과 음향 장비 등 열악한 공연 여건으로 인해 갑자기 공연 준비에 비상이 걸렸다.
그래도 모든 여건을 총동원하여 리허설을 무사히 마치고 문제가 없도록 조치를 취한 다음, 밀려오는 허기를 달래기 위해 투르크메니스탄에서 단 두 개인 한국 식당 중 한 곳으로 출발하였다. 도저히 없으리라 생각했던 쌀밥에 김치찌개 그리고 된장국, 열무김치를 게 눈 감추듯 먹다 보니 한국의 일류 한정식 식당이 부럽지 않았다.



세계의 공통언어, 춤
그렇게 사막의 밤이 지나고 드디어 공연 날이 되었다. 밤새 다림질한 의상을 챙기고 무대 분장을 한 뒤 거의 뜬눈으로 지내다시피한 단원들을 이끌고 결전의 장소로 이동하였다. 전 세계에 좀처럼 문을 개방하지 않는 ‘막툼굴리’ 극장에서 마침내 우리 것을 보여줄 때가 온 것이다. “짝” 하고 울려 퍼지는 박의 힘찬 울림과 함께 제천무로 시작된 우리 공연은 12작품이 진행되는 1시간 20분 내내 단 3초의 막간도 없이 긴장 속에 숨 가쁘게 진행되었다. 드디어 그처럼 무겁게만 느껴진 막이 공연을 끝낸 우리 앞에 흘러내릴 때, 아! 이게 웬일인가? 객석에서 터져 나오는 함성과 함께 이어지는 기립박수… 비록 생긴 모습은 달라도, 말은 통하지 않아도 무언의 몸짓인 춤은 세계 공통 언어라는 것이 다시금 뼈저리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다음날 오후, 어제의 공연 때문일까? 기나긴 여행의 여독 때문일까? 뻐근한 몸을 이끌고 호텔 로비에 집결하였다. 우리와 같은 비행기를 타고왔던 한국 축구단과 투르크메니스탄 축구단의 시합을 보기 위해서였다. 영상 40도를 웃도는 사막의 기후에서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움직인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들은 모두 고국에서 고이 간직해온 한복을 입고서 부채, 소고, 한삼 등을 들고 경기장으로 향하였다. 시합 내내 “대한민국!”을 외치며 부채와 한삼, 소고를 두드리며 목이 터져라 외친 순간이 지나 이윽고 경기는 3:1 한국의 승리로 끝났다. 이렇게 투르크메니스탄에서의 일정을 잘 마무리하고 주 투르크메니스탄 한국대사관에서 차려주신 맛있는 음식이 채 소화가 되기도 전에 다음 공연을 위해 아제르바이잔으로 떠났다.



바람의 도시에서 울려퍼진 북소리
아제르바이잔은 ‘불의 나라’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이곳의 수도 바쿠는 ‘바람의 도시’라는 뜻을 지니고 있었다. 불과 바람의 나라에서 펼칠 공연을 위하여 또다시 북을 머리에 이고, 장비를 어깨에 진 채 공항에서 수속을 끝내고 숙소에 도착한 우리는 곧바로 짐을 풀고 우리가 공연해야 할 ‘음악 코미디’ 극장으로 향하였다.
지구상의 가장 작은 바다 또는 가장 큰 호수인 카스피 해가 내려다 보이는 극장에 들어서는 순간, ‘지은 지 얼마나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삐걱거리는 나무문 하며 모서리가 많이 닳아 무뎌진 대리석계단…. 건물의 나이를 좀체 가늠할 수가 없었다.
열악한 조명 기기와 부족한 음향 장비를 대사관 직원들이 미리 준비해놓았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암담했을 뻔했다. 그러나 이곳 ‘음악 코미디’ 극장은 세계 유명 스타들이 공연을 하고 지나간 영광의 자리라고 생각하니 다시금 어깨가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현지 대사관 직원과 교민 그리고 스태프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파인 나무 바닥에 테이핑을 하고 튀어나온 못을 뽑아내며 장비를 나른 끝에 드디어 리허설을 거쳐 본 공연이 시작되었다. 이 조그맣고 낡은 극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관객들은 숨을 죽인 채 이번 여정의 마지막 공연이자 이곳에서의 첫 공연이 대망의 막을 올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역시 공연 내내 박수가 이어졌고 드디어 마지막 프로그램 ‘풍고’가 무대에 올랐다. ‘풍고’는 바람처럼 광대한 평야를 질주하는 기마 민족이었던 ‘여인족’의 기상을 살려 한국 여인의 내면에 흐르는 강인함을 표현한 작품이었다. 바람의 도시에서 울려 퍼진 우리의 북소리는 한 번도 기립박수가 없었던 이 극장의 전례를 처음으로 깨뜨렸다. 모두가 일어서서 기립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한국에서 무용단이 온다고 했을 때는 그저 정적이고 약간은 따분한 공연이겠거니 생각했어요. 그러나 채향순 중앙무용단의 이번 공연은 나의 선입견을 완전히 뒤집고 한국 무용도 이토록 역동적이며 심금을울리는 장한 메시지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정말 감동했어요”라며 만찬장에서 거듭 말씀하신 대사관 사모님의 마지막 인사가 아직까지도 귀에 쟁쟁하다.
돌이켜보면 힘든 여정의 모든 구석구석에서 우리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도운 한국국제교류재단이 있었기에 공연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나 싶다. 단원이 아파 응급실에 갈 때도 119 구급대처럼 모든 조취를 아끼지 않으셨던 한국국제교류재단 현지 인솔자 및 임직원 여러분, 외교통상부 임직원 여러분 그리고 현지 대사관 및 교민 여러분, 그들의 고마운 마음이 아직까지도 내 가슴에 다가와 메아리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