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떨떨했다. 어찌나 완벽하던지, 이 글자의 존재를 믿을 수 없어서 얼떨떨했다. 눈앞에 줄줄이 서 있는 글자 한 자 한 자가 나를 엄숙히 보고 있었다. 각각의 모양 속에서 번쩍번쩍 빛나는 경외감과 글에 흐르는 아름다운 균형을 느낄 수 있었다. 너무나 완벽해서 언어학자가 무슨 실험으로 만든 글자가 아닌가 싶었다.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것이 바로 내가 처음 한글을 만난 소감이다.
몇 년 전 어느 늦은 봄, 베네치아 대학교 도서관에서였다. 지금도 한글과의 첫 만남을 떠올리면 그날의 느낌이 되살아난다. 펼쳐진 책장 위에 새겨진 ‘ㄱㄴㄷㄹㅁㅂ’과 같은 글자들은 창문 밖 봄바람에 흔들리는 잎새처럼 멋지게 춤추는 듯했다. 한글에 대한 나의 첫 느낌은 항상 그 봄날의 글자로 기억될 것이다. 이 글자를 쓰는 언어를 꼭 배워야겠다고 생각하자 한국이라는 나라가 무척 궁금해졌다. 한 순간의 결심으로, 한글을 향한 나의 모험이 시작됐다.
그때부터 한국국제교류재단의 한국어 펠로로 활동하고 있는 지금까지 한글의 신비함이 아직도 낯설게 느껴지는 나는, 한글로 쓰인 글이라면 무엇이든 음미하며 읽는 것을 좋아한다. 한국에서 생활하고 공부하며 한국문화를 알게 될 수록 한국문학의 아름다움에 점점 더 빠져들게 됐다. 그러다 그 아름다움이 나의 고향 이탈리아에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문학은 한 나라 사람들의 인생, 사랑, 괴로움, 그리고 희망을 이야기하고 나누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문학은 그냥 문학이 아니라 그토록 훌륭한 한글로 이루어진 문학이다. 한글로 표현되는 유일한 문학이기에 그 자체로 유일무이한 의미와 가치를 갖는 문학. 그런 면에서 한국문학을 읽는 것은 한글의 미학적인 감상이라 할 수 있다. 문학을 통해 나는 한국인들과 함께 괴로워 하기도 하고 꿈꾸기도 하고 싶다.
한국역사 속에 등장했던 작가들의 작품 속 한글 한 자 한자마다 힘이 담겨 있다는 것에 가슴이 뛴다. 세월이 흘러도 그 속에 담긴 한글의 힘은 언제까지나 살아있을 것이기에 나는 한국 사람처럼 한글을 자랑하고 싶다. 또한 한국아이들이 한글로 교육을 받고 자라며, 그들의 머릿속에 이 아름다운 글자가 영원히 새겨진다는 사실이 나를 뭉클하게 한다. 이러한 경험과 생각은 ‘한국문학 번역을 통해 이탈리아에 한국을 알리고 싶다.’는 나의 인생목표에 밑바탕이 됐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경험과 ‘한국문학 번역가’라는 꿈을 꿀 수 있는 것은 한국국제교류재단 덕분이다. ‘한글의 나라’와의 인연이 오래오래 지속되길 바라며 앞으로 더 열심히 하겠다는 의지를 다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