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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로를 통해 본 한국

대학로의 극장들은 젊음의 특성으로 넘쳐난다. 활기찬 에너지, 자신감, 미숙한 예술적 기호, 충동성, 진지한 열정과 예측불가능성 등이 혼재한다. 많은 대학생들이 극장에 가는 것을 보면 즐겁다. 비록 불편한 환경이긴 하지만 그들의 인생을 바꿀지도 모를 세계적 수준의 공연을 관람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 넓지 않은 한국 연극계 중에서도 외국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곳 중 하나가 연극무대들이 밀집된 서울 대학로 지역이다. West End의 연극을 보러 일부러 런던에 가는 관광객은 있지만 한국 연극에 대해 알고, 그리고 연극을 보러 대학로에 가는 외국인 관광객은 극히 드물다. 그러나 나로서는 연극이 올려지는 무대, 젊은 관객들, 그리고 그 외에도 대학로에서 연극공연을 관람할 때만 느낄 수 있는 특별한 분위기 등이 흔히 알려진 밤거리 문화보다 더욱 흥미롭고, 연극의 이면에 있는 현대 한국 사회의 여러 면모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대학로는 낮 동안은 비교적 조용하다가, 오후 4시경이 되면 흥에 겨워 즉석에서 춤을 추거나, 록음악을 연주하거나, 배드민턴이나 농구를 한다든지, 군것질을 하거나 그저 어슬렁거리는 젊은이들로 넘친다. 이 생기발랄한 분위기 때문에 많은 관광객들이 대학로를 찾지만 연극팬이나 한국 문화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는 대학로 지하에 또 다른 세계가 있다. 북적대는 대학로의 건물 지하에 있는 40여 개의 소극장들이 그것이다. 그렇게 좁은 공간에 그토록 많은 극장들이 밀집되어 있는 곳은 세계 어느 도시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매우 좁고 그리고 대개는 불편한 극장에서 관객들은 저급한 코미디부터 세계 수준에 이르는 고급 예술까지 다양한 연극을 관람할 수 있다.

시카고의 작지만 건물 전면에 있는 연극극장들, 그리고 뉴욕의 Off-Off Broadway의 무대들은 찾아가기도 쉽고 현재 공연중인 레퍼토리를 marquee를 통해 효과적으로 홍보하고 있다. 반면, 대학로의 극장들은 묘하게도 대다수가 지극히 찾아가기 힘든 곳에,
그리고 건물지하에 자리잡고 있다. 마치 극장을 운영하는 사람이나 관객들이 ‘내막을 잘 아는’ 소수들로만 연극활동을 제한시키려는 듯한 인상을 준다. 25년 전, 한국에서 소극장 활동이 시작되었을 당시에는 ‘지하실’이라는 장소는 저렴하기도 했을 뿐더러 기존 사회 규범과 검열제한에 대한 연극인들의 저항을 상징하였다. 즉 ‘언더그라운드’라는 위치는 예술적,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검열제도가 이미 10년 전에 없어진 지금에 와서는 연극무대 또는 공연장의 자리는 세대간의 취향의 차이를 나타내 주고 있는 듯하다. 중년의 중산층들은 세종문화회관이나 예술의 전당, 혹은 세실(Cecil)극장 등에서 공연을 관람한다. 이들 공연장에는 넓은 로비와 안락한 의자, 휴게실 등이 갖추어져 있고 중간휴식시간을 포함하는데, 관람료는 2만 원에서 5만 원 정도이다.

반면 대학로의 젊은이들은 1회 관람료로 5,000원에서 15,000원을 지불하고, 협소한 계단을 내려가 로비라고 할 수도 없는 좁은 입구에 다다른다. 그리고 3미터도 채 안 되는 낮은 천장 아래 쿠션도 등받이도 없는 나무로 된 딱딱한 상자나 의자가 100에서 200개 정도 놓여 있는 어두컴컴한 공간을 더듬거리며 자리를 찾아 앉는다. 여유로운 감상이나 예술적 사색과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서울에서의 삶을 은유적으로 표현한다고 볼 수 있다. 비교적 편안한 관람석을 갖춘 극장에서도 1회 공연시간은 평균 90분으로 중간휴식 없이 진행된다. 편안하려 들지 말고, 연극이나 보고, 그리고 빨리 다음 볼일을 보라는 듯이.

한국에서 관람객은 80퍼센트 이상이 대학생들이고 이들은 대부분 핸드폰을 가지고 있다. 한국사회에서는 어떤 그룹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며 대부분의 학생들이 전화를 통해 친구들과 지속적으로 연락을 취하려 한다. 심지어 공연 중에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거나 걸려온 전화번호를 확인하고 있어 마치 모두 전화에 중독된 것처럼 보인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 모든 핸드폰과 호출기의 작동을 중지해 줄 것을 요청받지만 내가 관람했던 서른 번 남짓의 공연 도중, 전화나 호출기 발신음이 울리지 않았던 적은 거의 없었다. 더구나 핸드폰의 발신음은 단순한 신호음이 아니라 매우 길고 신경에 거슬리는 모차르트나 베토벤 곡의 전자음악이다.

비록 짜증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핸드폰은 안전문제와는 관련이 없다. 불행하게도 대학로 극장의 오랜 관습들은 대부분 공중의 안전을 위협한다. 예를 들면, 출입구의 수효가 부족하고 그 출입구를 가리는 천으로 된 휘장은 출입구 표시등을 가려버린다. 출입문을 가리는 것은 소음을 줄이기 위한 것일 수도 있고 혹은 극장을 외부 세계와 단절시키는 상징일 수도 있다. 그러나 위급한 상황이 발생할 경우, 누구도 그렇게 어두운 곳에서 쉽게 출입문을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때로는 대학생 관객들이 복도에 앉아서 관람을 하기 때문에 출구로의 통로를 아예 차단하기도 한다.(미국에서는 이를 법으로 금지하고 있다).

말이 난 김에 한 가지 덧붙이자면, 대학로가 아닌 어느 극장에 갔을 때, 관객들이 모두 입장한 다음 출구를 잠그는 것을 본 적이 있다.(이 또한 미국에선 법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많은 유치원 아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최근의 화재 사건에 비추어 보더라도 이는 상식에 어긋나는 일이다.) 어느 공연에서는 아무런 사전 예고도 없이 총을 발사하는 것을 보았다. 물론 관객들은 매우 놀랐고 좁은 극장 안이라 다들 귀가 먹먹해졌다. 게다가, 화약파편이 관객 쪽으로 날아왔는데, 다행히 어느 여성 관객의 얼굴이 아닌 다리에 맞았다. 그러나 총부리를 관객석을 향해 겨눈다는 연출은 아마 공사현장이나 거리, 혹은 건축설계에서 흔히 나타나는 공중의 안전에 대한 불감증을 반영하는 것은 아닐까. 극장 관계자들 중 아무도 영화 촬영 중 연출용 권총(공포탄)에 맞아 숨진 영화배우 Brandon Lee에 대하여 들어보지 못한 것일까? 무대 위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도 다반사다.(미국에서는 공연 중에 흡연이 연출될 것이라는 표시가 있기 전에는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이다). 65퍼센트의 성인남자들이 흡연을 하고 있는 한국적 삶의 단면들이 연극무대에서 연출되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공연 도중 대사가 없을 때면 으레 담배에 불을 붙이곤 하는데, 이는 예술적 관점에서도 효과가 의심스러운 연출이다. 끊임없는 흡연은 환기가 잘 안 되는 좁은 지하 공간에 갇힌 관객들을 유해한 담배연기에 노출시킬 뿐 아니라, 최악의 경우 누전으로 인해 화재가 발생할 경우, 화재 연기를 감지할 수 없게 하기도 한다.

만약 허파가 괜찮다면 그 다음은 귀가 문제다. 서울 도처에서 발생하는 심각한 소음 공해에 이미 익숙해진 젊은 관객들은 소음에 대한 감각이 무뎌졌음에 틀림없다. 대학로는 서울에서 ‘연극의 거리’로 불린다. 그러나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젊은이들의 ‘오락공간’이다. 조명이 어두워지면 내가 극장에서 들어본 중에 가장 요란한 음악이 울려 퍼진다. 소리의 섬세함보다는 볼륨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젊은이들을 위한 공간이 대학로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

국외에서 존경받는 중견의 한국인 예술가들은 대학로를 자신들의 예술의 고향으로 여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대학로의 극장들은 젊음의 특성으로 넘쳐난다. 활기찬 에너지, 자신감, 미숙한 예술적 기호, 충동성, 진지한 열정과 예측불가능성 등이 혼재한다. 많은 대학생들이 극장에 가는 것을 보면 즐겁다. 비록 불편한 환경이긴 하지만 그들의 인생을 바꿀지도 모를 세계적 수준의 공연을 관람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적 사회 구조가 학창시절이 지나면 연극을 관람할 수 있는 그런 여유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대학생들이 그렇게 열심인 것은 아닐까?

대학로의 점쟁이들도 이 문제에 답하지는 못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대학로는 현대 한국 연극의 활기찬 축제, 한국인들의 생활, 그리고 앞으로의 한국연극계의 방향 설정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