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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는 우리 땅

독도는 1,500년 전부터 한국의 영토이었으며 이러한 증거는 우리나라의 역사책 여러 곳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외면하는 일본의 주장이 얼마나 억지인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1 독도는 어디에 위치한 섬인가?
경위도상으로는 북위37도14분18초, 동경131도52분22초 지점에 있는 대한민국의 가장 동쪽에 있는 영토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산1-17번지이다. 독도는 울릉도로부터 동남쪽으로 약 92km 지점에 있고, 일본의 가장 가까운 섬인 시마네현 오키도(隱岐島)로부터 서북쪽으로 약 160km(약86해리)떨어진 지점에 있다. 독도는 동도와 서도라는 두 개의 섬과 그 주위에 흩어져 있는 36개의 암초이며, 독도의 총면적은 18만6121㎡이고 서도의 산 높이는 174m, 동도의 산 높이는 99.4m이다.

2 독도는 언제부터 한국의 영토였는가?
독도가 한국의 영토가 된 것은 신라 지증왕 13년(512)에 이사부를 시켜 우산국을 병합한 1500년 전부터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 지증왕 13년(512) 여름 6월에 우산국(于山國))이 귀순하여 해마다 토산물을 바치기로 했다. 우산국은 명주(溟州)(현재 강릉)의 정동쪽 바다에 있는 섬으로 울릉도(鬱陵島)라고도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 지리지』에도 “우산도(于山島)와 무릉도(武陵島)는 본래 두 섬으로 서로 거리가 멀지 않아 바람이 불지 않고 날씨가 맑으면 바라볼 수 있다”고 되어 있고,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우산(于山)과 무릉(武陵) 두 섬이 현의 정동(正東) 해중(海中)에 있다. 두 섬의 거리가 서로 멀지 아니하여, 날씨가 맑으면 가히 바라볼 수 있다. 신라 때에 우산국(于山國)이라고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위의 『삼국사기』와 『고려사지리지』 그리고 『세종실록지리지』의 내용을 살펴보면 독도는 신라 지증왕 때 우리나라의 영토에 편입되었으며, 우산국은 울릉도와 우산도(독도)를 가리킨다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거기에 비하여 일본측 문헌에 독도가 처음 나오는 것은 1667년에 편찬한 『은주시청합기(隱州視聽合記)』이다. 이 책은 출운(出雲:시마네현의 옛이름)의 관리(蕃士)인 사이토(齊藤豊仙)가 번주(藩主)의 명을 받고 1667년에 은기도를 순시하면서 보고들은 바를 기록하여 보고서로 작성하여 바친 것이다. 이 책에서 처음으로 독도는 송도로 울릉도는 죽도로 호칭되었다.

3 고려시대에는 독도를 어떻게 관리하였는가?
고려시대에는 울릉도에서는 고려 왕조에 여러번 조공을 바쳤으며, 고려 왕조도 울릉도에 여러 차례에 걸쳐 행정구역을 설치하여 직접 지배하려고 시도하였으나 거리가 멀고 풍랑이 심하여 이러한 계획을 중단하였다. 고려시대에도 우산국은 울릉도와 우산도로 파악하였다.

4 『동국여지승람』이나 『만기요람』 등에는 독도가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가?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 강원도 울진현 조에 “우산도ㆍ울릉도(무릉이라고도 하고 우릉이라고도 한다) 두 섬은 현의 정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고 기록되었다. 우산도(독도)와 울릉도 두 섬이 행정구역상으로 강원도 울진현에 속한 조선왕조의 영토로 밝혀 놓았다.
1808년에 편찬된 『만기요람』 군정편(軍政編)에는 “『여지지』(輿地志)에 이르기를 울릉도와 우산도는 모두 우산국 영토이다. 우산도는 왜인들이 말하는 송도(松島:마쓰시다)다”라고 기록하였다. 여지지는 17세기에 유형원이 쓴 지리지인데 그 책에도 우산국은 울릉도와 우산도라고 밝혀 독도가 우리 영토임을 명백히 하였고, “우산도는 왜인들이 말하는 송도(松島:마쓰시다)다”라고 하여 우산도가 독도임을 거듭 밝히고 있다.

5 조선 초기 『조선왕조실록』에는 독도에 관하여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가?
조선 초기까지도 울릉도 지역을 우산국으로 여겼으며, 울릉도는 무릉도 또는 울릉도로 부르고, 독도는 우산도ㆍ요도ㆍ삼봉도 등으로 불렀다.
태종은 왜구를 근절하고 병역 기피자와 범법자들이 육지에서 도망하여 섬에 들어가 사는 것을 막기 위하여 공도정책(空島政策)를 추진하였다. 울릉도에도 초기에는 150여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을 모두 육지로 이주시켜 정착시키고 울릉도를 비워두는 정책을 썼다. 이 과정에서 울릉도가 아닌 또 다른 섬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그 섬을 우산도(독도)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조선 초기부터 독도를 우산도로 인식하기 시작하였으며 동람도(東覽圖)를 비록한 우리나라 고지도에는 울릉 옆에 우산도를 반드시 그렸다. 조선 초기에는 우산도를 대륙 쪽으로 울릉도의 안쪽에 그렸다. 우산도가 정확하게 현재의 독도처럼 울릉도의 동쪽에 그려지기 시작하는 것은 안용복의 독도 지키기 활동이 있은 후에 독도에 대한 정확한 지리인식이 갖추어진 이후의 일이다.

동람도
동람도는 1531년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 첨부된 지도로 울릉도를 울릉도로 독도는 우산도로 표기함. 독도를 우리나라쪽에 표시한 것은 이 지역에 대한 정확한 지리 인식이 부족하였기 때문임. 17세기 안용복의 독도 지키기가 있은 후에는 현재의 독도 위치인 울릉도 동쪽에 표시함.
6 일본 정부가 독도를 “역사적으로 일본의 고유영토”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도쿠가와 막부가 1618년에 내준 「죽도도해면허」(竹島渡海免許)와 1661년에 내준 「송도도해면허」(松島渡海免許)이다.
일본의 백기주(白耆州)의 미자(米子)에 거주하던 오오다니(大谷甚吉)가 태풍을 만나 울릉도에 피신한 일이 있었다. 우리나라는 조선 초기부터 공도정책으로 울릉도를 비워둘 때였는데 오오다니는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울릉도를 무인도로 착각하여 도쿠가와 막부의 관리들과 친분이 두터운 무라가와(村川市兵衛)와 함께 1616년에 「죽도도해면허」를 신청하고 허가를 받으려고 하였다. 그 결과 도쿠가와 막부의 관리로 백기주 태수직을 맡고 있던 송평신태랑광정(松平新太郞光政)이 1618년에 오오다니와 무라가와 두 가문에 죽도도해면허를 내주었다. 이들은 1661년에는 “죽도근변송도도해건(竹島近邊松島渡海件)”을 청원하여 송도(松島:독도) 도해 면허도 받았다. 위의 사실은 오히려 우리에게 유리한 증거다. 만약에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의 영토라면 자국민이 자국의 영토를 출입하는데 무슨 면허가 필요하겠는가?

7 안용복이 독도를 지키기 위하여 한 일은?
숙종 19년(1693)에 동래의 안용복(安龍福) 등이 울릉도에 고기잡이 갔다가 일본의 오오다니 가문에서 보낸 일단의 일본 어부들과 충돌하였다. 일본 어부들은 안용복을 납치하여 은기도 도주에게 끌고 갔다. 안용복은 은기도 도주에게 울릉도가 조선 영토임을 지적하면서 “조선 사람이 조선 땅에 들어가는데 왜 납치하여 구속하는가?”하고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이에 은기도 도주는 그의 상관인 백기주 태수에게 안용복 등을 이송하였고, 백기주 태수는 자기가 결정하기에는 어려운 사항이었으므로 안용복을 에도(동경)의 막부 관백(최고통치자)에게 이송하였다.
도쿠가와 막부의 관백은 안용복을 심문한 후 백기주 태수를 시켜 “울릉도는 일본의 영토가 아니다(鬱陵島非日本界)”라는 문서를 써주고 안용복을 후대하여 돌려보냈다. 숙종 21년(1696) 1월에 대마도주가 바뀌어 막부 장군에게 인사차 들렸을 때 막부 장군은 대마도의 새로운 도주인 종의진(宗義眞)과의 질의응답을 통하여 사태를 파악하고 다음과 같이 명령하였다. 첫째 죽도(울릉도)는 일본 백기로부터 거리가 약 160리이고 조선으로부터는 40리 정도로 조선에 가까워 조선의 영토로 보아야 하며, 둘째 앞으로는 그 섬에 일본인의 항해를 금지하며, 셋째 이 뜻을 대마도 태수는 관리를 파견하여 조선측에 통고하도록 하였다.

8 안용복의 제2차 독도수호운동은 어떠했는가?
안용복은 숙종 22년(1696)에 다시 울릉도에 들어갔다. 울릉도에는 이미 일본 배들이 건너와 정박하고 있으므로 안용복은 “송도는 곧 자산도인데 이 역시 우리 땅이다. 너희가 감히 그곳에 산다고 하느냐?”하고 이들을 꾸짖어 내쫓았다. 안용복은 그 길로 일본 어부들을 쫓아 은기도를 거쳐 백기주에 들어가 태수를 만나 항의하였다. 백기주 태수는 우선 안용복에게 쫓겨 온 일본 어부 15명을 적발하여 처벌하였다. 또한 백기주 태수는 안용복에게 “두 섬이 이미 당신네 나라에 속한 이상 만일 다시 침범하는 일이 있으면 마땅히 무겁게 처벌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숙종 22년(1696)에 백기주 태수가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 영토의 일부이므로 일본 어부들의 고기잡이를 금지한다고 재확인하므로 논쟁은 종결되었다.

9 안용복 사건이후 독도는 어떻게 관리되었는가?
조정에서는 왜인들이 울릉도를 자기들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은 우리 정부에서 오랫동안 울릉도를 비워두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앞으로는 3년마다 1회씩 지방관을 파견하여 울릉도와 독도 정세를 살펴 관리하도록 하였다. 숙종 25년(1699)에는 강원도 월송만호 전회일(田會一)이, 숙종 28년(1702)에는 삼척영장 이준명(李浚明)이 울릉도를 조사하였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자 울릉도 수토사(搜討事)는 뱃길이 멀고 파도가 험하며, 생명을 잃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지방관들이 적당한 핑계를 대고 수토를 기피하려 하였다. 숙종 43년(1717)에 강원감사 이만견(李晩堅)이 울릉도 수토는 빈 섬을 확인하는데 불과한데 민폐가 심하니 중지하자고 건의하여 일시 중지되기도 하였으나 숙종때처럼 왜인들의 범경사(犯境事)가 재발할 수 있으므로 3년 마다 1회씩 계속 수토(搜討)하여 울릉도와 독도를 우리의 영토로 지켜왔다.

당빌 조선왕국도
1737년에 서양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단독 한국지도로 울릉도를 중국식으로 표기하여 훨링타오이고 독도는 우산도를 천산도로 잘못읽어 천산타오로 표기함.
10 근대에 들어와서 메이지 정부도 계속적으로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영토로 간주했는가?
메이지 정부도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영토로 인정하였다. 그 첫 번째 증거로 1869-1870년의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朝鮮國交際始末內探書)라는 문서가 일본 외교문서 제 3권에 수록되어 있다. 메이지 정부는 신정부 수립 후 1869년 12월에 조선국과의 국교 확대 재개와 “정한(征韓)”의 가능성을 내탐하기 위하여 외무성 고위관리인 좌전백모(佐田白茅) 등을 부산에 파견하여 14개의 항목을 정탐하여 오라고 하였다. 그 중 하나가 “죽도(竹島)와 송도(松島)가 조선의 부속(附屬)으로 되어 있는 시말”을 내탐해 오라는 것이었다. 이들이 귀국하여 보고한 「죽도와 송도가 조선부속으로 되어 있는 시말」 보고서에서 송도(독도)는 죽도(울릉도)의 이웃 섬으로 두 섬이 모두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이지만 조선의 영토라고 보고하였다. 이는 일본의 공문서에 울릉도와 독도가 한국의 영토임을 분명히 한 자료이다. 그 두 번째 증거는 1876년에는 일본 내무성이 일본 전국의 지적(地籍)을 조사하여 근대적 지도를 만들려고 하였다. 이 때 시마네현의 지적 담당자는 동해에 있는 죽도(울릉도)와 송도(독도)를 시마네현의 지도에 포함시킬 것인가 뺄 것인가에 대한 질의서를 내무성에 질의하였다. 일본 내무성은 5개월간의 조사 끝에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과 하등의 관계가 없는 조선의 영토라는 결론을 내고 일본의 지적 조사에서 제외하도록 조처하였다.

11 일본이 독도를 송도라 하지 않고 리앙쿠르드岩이라고 부른 이유는?
1876년에 일본인 무등(武藤平學)이 동해에서 죽도(울릉도) 아닌 새 섬을 발견하였다고 하며 “송도개척건”을 청원하였다. 일본 해군성은 천성환(天城丸)이란 군함을 파견하여 1878년과 1880년 두 차례에 걸쳐 송도(松島)의 실체를 조사했으나 송도는 곧 울릉도임을 확인하였다. 이때부터 울릉도를 송도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이전까지 독도를 송도라고 불렀으므로 독도의 새로운 이름이 필요하여 프랑스의 포경선이 붙인 “Liancourt Rocks”를 취하여 “리앙쿠르드암”이라고 수로지에 표시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를 본 일본 어부들이 ”리앙꼬島”라고 약칭하였다. 참고로 프랑스는 독도를 1849년부터 리앙쿠르암이라고 불렀고, 러시아는 1854년부터 메날레ㆍ올리우차라고 표시하였으며, 영국은 1855년부터 호네트암이라고 불렀다.

12 근대에 들어와서 조선 정부는 울릉도를 어떻게 관리하였는가?
근대에 들어와서도 조선 정부는 울릉도를 비워두는 공도 정책을 계속하였다. 이러한 빈틈을 이용하여 일본 어부들의 불법 어로와 일본인들의 불법적인 벌채 행위가 울릉도에서 계속되었고, 일본 군함의 불법활동이 증가하여 조선 정부는 이규원(李奎遠)을 울릉도 감찰사로 보내 공도정책의 폐기와 울릉도의 재개척 여부를 조사시켰다. 이규원은 배 세척에 102명으로 된 대규모 조사단을 편성하여 1882년 4월 29일부터 6일간 현지 조사를 실시하였다.

13 울릉도 재개척 사업은?
1883년 3월에 김옥균(金玉均)을 “동남제도개척사겸관포경사(東南諸島開拓使兼管捕鯨使)”로 임명하여 1883년 4월 최초의 이주민 16호 54명을 정착시켰고, 일본인들 중 불법 침입한 일본인 254명을 모두 철수시켰다. 그 후 울릉도에 전임 도장(島長)을 두고 관리하다가 1895년에 도장을 도감(島監)으로 바꾸었다.

14 근대 문서 중에 독도가 우리 땅임을 밝혀주는 문서는 어떤 것이 있나?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를 들 수 있다. 이 칙령은 울도군 설치에 관한 칙령인데 그 내용은 제 1조에 1900년 10월 25일자로 울릉도를 울도로 개칭하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하며, 제2조에 울도군의 관할 구역은 “울릉 전도와 죽도(竹島) 석도(石島)를 관할할 사”라고 한 점이다. 여기서 죽도는 울릉도 바로 옆의 죽서도(竹嶼島)이고 석도(石島)가 독도(獨島)를 가리킨다. 전라도 방언에 돌을 독이라고 하고 돌섬을 독섬이라고 부르는데 음역하면 독도이고, 의역하면 석도(石島)이기 때문이다.

15 독도(獨島)라는 표기는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에서는 우산도라고 불렀는데, 1904년에 일본 군함 신고호(新高號)가 이 지역을 답사하고 쓴 항해일지에서 “송도(울릉도)에서 리앙코르드암을 한국인은 독도(獨島)라고 쓰고 본방(日本)의 어부들은 리앙코도”라 한다는 기록이 처음이며, 우리나라에서는 1906년 울릉군수 심흥택의 보고서에 처음 발견된다. 신고함의 항해일지를 참고하면 1904년 이전부터 울릉도에 거주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독도라는 칭호를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16 러ㆍ일전쟁과 독도의 관계는?
1904년 러ㆍ일전쟁이 터지자 일본은 러시아 함대의 동태를 감시하기 위해 독도가 매우 귀중한 전략적 요충지임을 인식하고, 일본 해군이 설치했던 20개소의 해군 망루 중 두 개는 울릉도, 한 개는 독도에 설치하였다.

1) 삼국사기 우산국 복속기사
지증왕13년 (512)에 우산도가 신라에 복속된 기사
2) 심흥택 사진
1905년에 독도를 불법 강점한 일본은 이를 조선에 통고하지도 않았고, 1906년에 독도를 탐험한 후 우연히 울릉도에 들려 군수 심흥택에게 이사실을 알렸고 심흥택은 깜짝 놀라 바로 중앙정부에 보고함.(사진 뒷줄에 대형 캐극기를 펼처들고 관복을 입고 서있는 심흥택 군수)
3) 대한제국칙령제41호
1900년에 울도군을 설치하고 울도군의 관활을 울릉도와 죽도와 서도로 한다고 규정하여 독도가 우리 영토임을 밝힌 칙령

17 나카이(中井養三郞)의 독도 어업 독점권은 어떤 목적에서 나왔는가?
나카이는 독도에서의 물개잡이가 이익이 많았으므로 독점권을 확보하려고 하였고, 일본 정부는 전략적 요지인 독도를 확보할 목적에서 이 사업이 추진되었다. 처음에는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알고 한국에 독도 이용권을 허가 받으려고 하였는데, 러•일전쟁을 수행하던 해군성은 독도가 전략적 요충지이므로 나카이를 충동하여 일본 정부의 내무성•외무성•농상무성의 세 대신에게 “리앙코도 영토편입 및 대하원”을 제출하도록 종용하였다. 내무성은 한국정부와 국제적 여론을 고려하여 이 청원을 각하하려 하였으나 외무성의 적극적인 추진으로 이를 허가해 주었다.

18 일본 정부는 “독도 불법 강점” 고시를 어떻게 하였는가?
1905년 2월 15일 훈령 87호로 시마네현 지사에게 통고하였고, 시마네현은 1905년 2월 22일 다케시마 편입에 대한 시마네현의 고시 제40호로 “북위 37도9분30초,동경 131도 55분, 은기도에서 서북으로 85해리 거리에 있는 섬을 다케시마(竹島)라고 칭하고 지금 이후부터는 본현 소속 은기도사(隱岐島司)의 소관으로 정한다”는 고시문을 시마네현의 “현보(縣報)”에 조그맣게 게시하였다. 중앙 정부에서 고시하지 않고 중앙 일간지에도 보도하지 않은 이유는 첫째, 일본은 우리나라를 통째로 병합하려는 야욕을 가지고 있었는데 조그마한 독도를 편입하고 열강의 항의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였다. 둘째, 동경에서 이 문제가 불거지면 동경에는 한국의 공사관도 있고 한국 유학생도 많았으므로 이 사실이 한국에 알려져 우리나라의 강력한 항의를 받을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19 대한제국정부는 이 사실을 언제 알았는가?
1906년 3월28일 일본 시마네현의 신서(神西)사무관과 은기도사 일행이 독도를 시찰하고 돌아가려 하였지만 풍랑이 심하여 곧바로 돌아가지 못하고 울릉도에 기착하였다. 이들은 울도군수 심흥택(沈興澤)을 방문하여 대화하는 과정에서 간접적으로 독도 편입 사실을 말했을 뿐 일체의 외교문서 제출 등의 조치가 없었다.

20 울도군수 심흥택의 조치 사항은?
심흥택은 깜짝 놀라 그 이튿날인 3월 29일에 강원도 관찰사에게 긴급 보고하였다. 그 보고서에는“본군 소속 독도가 본부의 바깥 바다 백 여리쯤 떨어져 있었는데…” 일본 관리들이 방문하여 그들 스스로 말하기를 “독도가 이제 일본의 영지가 되었기 때문에 시찰차 내도했다(“自云 獨島 今爲日本領地故 視察次來島)”라고 하였다. 강원도 관찰사는 심흥택에게 앞으로 일본인의 동태를 잘 살펴 보고하도록 조처하였으며, 대한매일신문이나 황성신문은 특보로 이 사실을 보도하였고,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울릉도의 바다에서 동쪽으로 100리 거리에 있는 한 섬이 있어 울릉도에 구속(舊屬)했는데 왜인이 그 영지(領地)라고 늑칭(勒稱)하고 심사하여 갔다.”고 썼다. 우리정부가 일제의 독도 불법 강점 사실을 공식적으로 항의하지 못한 것은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외교권을 빼앗겼고, 1906년 1월 외부(外部)가 폐지되었으며, 1906년 2월에는 통감부가 설치되어 내정간섭까지 받게되면서 어떠한 조치도 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21 1951년의 “대일본강화조약”에서 독도가 왜 누락되었는가?
제1차 초안(1947.3.20)과 제2차 초안(1947.8.5), 제3차 초안(1948.1.2), 제 4차 초안(1949.10.13), 제 5차 초안(1949.11.2) 까지는 독도가 명기되었다가 제6차 초안(1949.12.29)에는 일본측의 집요한 로비로 인하여 오히려 독도가 일본의 영토로 표시되었다. 이 초안을 본 호주, 뉴질랜드, 영국 등 다른 연합국들이 강력하게 항의했다. 이 중 영국은 세 차례의 초안을 작성하여 미국 측에 항의하고 지도까지 작성하여 독도가 한국 땅임을 명시하였다. 사정이 이와 같이 전개되자 미국도 당황하여 제7차 초안부터는 독도의 영유권을 한국이나 일본 어느 쪽에도 명시하지 않은 채 합동초안(1951.5.3)를 마련하여 독도의 영유권을 분명히 하지 못했다.

22 독도는 어떠한 가치가 있는가?
첫째, 독도는 영해, EEZ, 어업권 우리의 주권을 분명히 행사할 수 있는 전초기지이다. 둘째, 냉동가스 등 무한한 지하자원의 보고다. 셋째, 심층수의 활용등 미래의 식수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