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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속 나의 자리를 찾아서

나의 연구주제는 최근 전통시장을 현대적이고 세계적인 패션의 메카로 만들기 위해 대규모 재개발 계획이 추진되고 있는 동대문시장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젠더(성) 관계의 변화에 관한 것이다. 내가 서울에 온 주목적은 인류학과 젠더학(Gender Studies) 방법에 기초하여 가능한 많은 동대문 시장의 근로여성들을 대상으로 참여관찰과 심층면접을 실시하고 격식 없이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다.


내가 초점을 둔 대상은 오랫동안 동대문시장에서 일하고 살아왔지만 지역당국이나 언론, 학계로부터 관심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삶의 터전을 빼앗긴 상인, 노점상, 의류 노동자들이었다. 바로 이 곳에서 사람들은 매 순간 자신의 자리를 찾기 위해, 혹은 지키기 위해 물리적으로, 그리고 두서없이 투쟁하고 있다. 따라서 내가 보낸 지난 4개월간의 과정은 주로 나의 자리, 그리고 그들의 자리는 어디인가를 연구하는 것이었다.

어느 나라 사람이에요? 서울에서 연구를 시작하자마자 나는 대부분의 현지인들은 그들에게 익숙한 사회적, 문화적 위치나 범주에서 내가 어디에 속하는지 알아내고 싶어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울 사람들은 대개 국적, 성, 나이, 생애주기 등과 같이 외적인 것에 기초하여 다른 사람을 인지하려는 것 같다. 그들은 종종 개인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피하고 그들이 무슨 일을 하는가, 혹은 그들이 속한 환경에 따라 서로를 부른다.
우선 첫번째로 내가 받은 질문은 나의 국적이었다. 내가 어디에서 왔는가에 대한 질문이 아니었다. 나는 일본 국적자로서 한국을 비롯하여 여러 나라에서 오랫동안 살았다. 그러나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람들을 단 하나의 나라, 즉 하나의 국가화된 문화에 속해 있는 것으로 인식하는 게 중요했다. 따라서 그들에게 나는 항상 일본인이었다. 서울 사람들이 일본인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그들이 수용하는 언론매체가 제시하는 관점과 내가 실제로 얼마나 다르건 간에 내가 만난 대부분의 서울사람들은 나를 그 무엇보다도 먼저 ‘일본인’으로 인지했다.
한국에 대한 연구를 처음 시작할 때 나는 당연히 이 점을 걱정했다. 나는 이곳에서 일본인 연구자는 위협적인 존재로 여겨질 지 모른다고 느꼈다. 특히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사회문화적 갈등을 야기하는 양국간의 수많은 정치적 문제를 고려해 볼 때 그러했다. 저 여자가 우리를 감시하는 건가? 도대체 이런 질문을 왜 하는 거지? 나는 내가 만나게 될 많은 서울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이런 느낌을 가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점차 나를 알게 된 사람들은 나를 친구처럼, 마치 그들 중 하나처럼 대해 주었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익숙한 한국/서울의 맥락관계 속에서 또 다른 하나의 사회적 범주로 나를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필자 노리타케 아야미


‘아줌마’예요, ‘아가씨’예요?
두번째로, 나는 그들에게 ‘여자’였다. 나는 한국/서울의 여자 범주에 속한 사람이어야만 했다. 서울에서 ‘여자’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나이, 생애주기, 신체적 외모와 뒤얽혀 있다. 사람들은 내가 결혼했는지 셀 수도 없이 많이 물어봤는데, 그들의 말투는 내가 아마도 미혼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나는 결혼해서 아홉 살, 일곱 살 된 아이가 둘이나 있지만 많은 노점상들 ─ 대부분 중년 혹은 나이 지긋하신 어머니나 할머니들 ─ 은 나를 ‘아가씨’라고 불렀다. 내가 결혼했다고 말하면 그들은 아이가 있는지 물어봤다. 내가 ‘그렇다’고 대답하면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혼자 서울에 있을 수 있냐고 물었다. 남편이 착해서 아이들과 집안일을 잘 챙기고 있다고 말하면 그들은 굉장히 감탄해 마지 않았다.
내가 만난 대부분의 서울 사람들을 혼동시켰던 것은 아마도 내 나이였던 것 같다. 나는 옷차림새를 비롯하여 서울의 결혼한 중년 아이 엄마들에게 볼 수 있는 공통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지 않은 듯하다. 사람들이 예상하는 외모와 일치하지 않는 서울의 중년, 한국인 유부녀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지만, 결혼한 중년의 엄마들에 대한 전통적인 이미지는 서울 사람들의 일상생활 여러 면에서 여전히 존재한다. 사실 많은 서울사람들은 외모로 사람들의 사회적 위치를 판단하는 데 익숙하며, 이 외모는 한국/서울의 기준에 따라 평가된다. 여자를 칭하는 ‘할머니’, ‘아줌마(중년/결혼한 여자)’, ‘아가씨’라는 말은 그녀에 대한 자신의 지식과 즉각적인 느낌에 기초한 것으로, 이는 여자의 신체적 외모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잘 알다시피 이러한 사회적, 문화적 압력은 매우 강해서 최소한 서울에 사는 많은 젊은 여성과 좀 더 나이든 여성들은 힘든 다이어트나 성형수술을 통해 ‘아가씨’로서 전형적인, 혹은 이상적인 체형을 갖거나 유지하려는 생각에 사로잡혀있다. 남자를 부르는 호칭에서는 여자처럼 ‘아줌마’와 ‘아가씨’를 구분하는 것과 같은 말이 없다는 것은 주목할 만 하다.

선배, 아니면 후배? 자기 자신 아니면 국익?
내가 발견한 놀랍고도 충격적인 또 한 가지는 자신과 남에 대한 대안적인 시각을 주장하는 서울의 한국인 학자들 사이에서조차 그 관계에서 위계적인 행태가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전에 학술회의에 참가한 적이 있는데, 사람들은 서로 이름 뒤에 ‘박사님’, ‘교수님’ 등과 같이 구체적인 학위나 직위를 붙여 불렀다(하지만 나한테는 이름으로만 불렀다!). 누군가가 아직 박사 과정을 끝내지 않은 사람에게 ‘박사님’이라고 잘못 부르기라도 하면 다른 사람이 즉각 그 사람은 아직 박사가 아니라고 지적했다. 이런 체계가 과연 그들의 학문적, 사회적 임무에 긍정적 영향을 주는지 궁금하다. 이것도 앞으로 연구해 볼만한 주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또한 서울의 잘사는 많은 한국인들이 외국인들에게 한국사회의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대단히 열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의 지역사회에 대한 장밋빛 견해를 들었던 것이, 한편으로는 한국인 혹은 서울 사람들을 인류학적 관점에서 보다 잘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사랑해요, 서울
연구경험과 관련하여 자그마한 점 하나를 덧붙이고자 한다. 나는 항상 환경친화적인 태도로 연구를 하려고 노력해왔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간단한 예를 들자면, 나는 기록문서연구를 위해 연구자료를 복사하는데 시간을 보내기도 했는데, 그 어떤 도서관이나 연구소에서도 양면 복사를 할 수 없었다. 매번 양면복사를 요청해도 그렇게 하면 시간이 너무 많이 들고, 복사기도 과열되어 고장이 날 수 있다는 이유로 양면복사를 하지 못하게 했다. 나는 서울에서의 내 연구가 환경적으로 유해했다는 사실 때문에 기분이 안 좋았을 뿐 아니라 한국에서 환경보호에 대한 이야기를 너무나도 많이 들었기 때문에 한편으론 놀랍기도 했다. 다음에 서울을 방문했을 때에는 좀 더 친환경적인 연구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기를 바란다.
어쨌든 연구를 위해서건 다른 일 때문이건 앞으로도 여러 번 서울에 다시 오게 되리라는 것은 확실하다. 그건 내가 서울과 서울 사람들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역동성과 내가 맺은 풍요로운 개인적인 친분관계는 연구에 도움이 되었을 뿐 아니라 서울과 서울 사람들에 대한 이해를 풍부하게 해주었다. 또, 한국학, 특히 남한에 관심 있는 외국인 학자들에게 상호 의사소통과 정보습득, 이해가 가능할 정도로 한국어를 잘 배우라고 제안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