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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학으로서의 한국학

야기엘로니안(폴란드어로는 야기엘론스키) 대학교 (Jageilonian University Uniwersytet Jagiellonski)는 1364년 카지미에쥐 대왕(Kazimierz Wielki)에 의해 ‘크라쿠프 아카데미’라는 명칭으로 설립되었다. 설립 당시 법학, 의학, 학예 3개의 학부로 출범했으며 중동부 유럽에서는 프라하 대학교(1348년) 다음으로 가장 오래된 전통을 지닌 폴란드 최고의 고등 교육기관이다. 폴란드 문화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크라쿠프에서 650여년을 이어온 야기엘로니안대학교는 2007년 현재 15개 학부 104학과에 6,700명의 교원과 44,000여 명의 학생이 재직(학)하고 있는 명실상부한 폴란드 최고(最高)의 대학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야기엘로니안 대학 본부

지역학으로서의 한국학
2001년 신설된 지역학부 (Instytut Studiow Regionalnych)는 야기엘로니안대학교에 한국학 도입이라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지역학부 내에 설치된 중동 극동학과 (Katedra Bliskiego i Dalekiego Wschodu)에서 폴란드 최초로 지역학으로서 아시아 관련 프로그램을 도입했기 때문이다. 이는 전통적으로 대부분의 유럽권 대학이 기존 아시아 관련 학문을 어문학 중심으로 다루어 왔음을 고려하면 매우 이례적인 경우였다. 학제간 연계 (Inter-disciplinary)를 바탕으로 지역학을 추구한다는 취지 하에 특정 언어권의 어문학이 아닌 문화학 중심의 ‘아시아학’으로서 교육 프로그램이 도입된 것이다. 그리하여 어문학은 선택 외국어로 전체 프로그램의 일부로 크게 축소 편성되었으며 아시아 지역에 정통한 사회학, 철학, 경제학, 정치학 전공 중심의 교수진에 의해 당시로서는 파격적이라 할 수 있는 커리큘럼이 짜여졌다. 또한, 2004년에 중동-극동학과 새 캠퍼스로 이전하면서 문화학과와 공동으로 운영하던 프로그램에서 완전 독립했으며 극동학과 중동학 전공 커리큘럼도 각각 세부적으로 재정비되었다.
폴란드 최초로 도입된 극동 및 중동 지역학 전공이라는 새로운 교육 프로그램이 어느 정도 기틀을 잡아감에 따라 2004년 초대 학과장 고(故) 카피셰프스키 (Andrzej Kapiszewski) 교수는 한국국제교류재단에 한국학 프로그램 운영을 위한 객원교수 파견 신청을 하게 된다. 그는 아랍에미레이트 주재 폴란드 대사를 역임한 바가 있는 중동문제 전문가이나 한국과의 인연 또한 각별한 인물이다. 1989년 한국과 폴란드의 외교관계 수립 이전에 이미 비공식 특사자격으로 한국을 방문하여 양국의 수교에 초석을 다진 바 있으며, 같은 해 폴란드 대학으로는 최초로 야기엘로니안대학교와 한국외국어대학교 사이에 교육교류협정을 체결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바 있다.
2005년 10월 야기엘로니안대학교에 최초로 도입된 한국학 과목은 한국문화, 한국역사, 그리고 한국정치경제 세 과목이다. 이 중 ‘한국문화’는 난이도를 조절하여 학부생 2학년과 석사과정생 1학년을 대상으로, ‘한국역사’와 ‘한국정치경제’는 석사과정생 1, 2학년을 대상으로 현재 각각 한 학기씩 운영되고 있으며 이들 과목은 모두 극동학 전공 필수과목으로 지정되어 있다. 각 과목은 주 4시간, 한 학기에 총 15주로 편성되어 있다.
수업 진행에 있어 한가지 특이할 만한 사항은 주당 4시간의 각 과목 수업이 ‘강의(wykład)’와 ‘연습 (cwiczenie)’으로 각각 2시간씩 나뉘어져 있다는 점이다. 이는 폴란드 대학교육의 특징으로 모든 학과의 주요 과목들은 이와 같이 편성되어 있다. ‘강의’는 교수가 학생에게 일방적으로 지식을 전달하는 수업을 의미하고 ‘연습’은 강의 주제에 대한 질문과 답변, 관련 문헌의 독서, 발표 및 토론, 기타 형태의 ‘실습 활동’을 포함하는 쌍방향 수업을 의미한다.

도전과 희망
폴란드에게 있어서 한국은 아시아 국가 중 가장 큰 규모의 투자국이며 폴란드는 중동 유럽국가 중 가장 대규모로 한국의 직접 투자가 이루어지는 국가이다. 또한, 아시아 국가 중 가장 많은 수의 한국인 관광객이 매년 이 나라를 찾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경제관계를 떠나 학술, 문화 측면에서 이야기하자면 한국의 인지도는 중국과 일본에 크게 못 미치고 있다. 특히 야기엘로니안대학교가 위치하고 있는 크라쿠프는 폴란드인들에게는 문화와 교육의 수도라고 인식되고 있는 곳인데, 이곳에는 1994년에 ‘일본 문화기술원’이, 그리고 2006년에는 ‘공자학원’이 각각 설립되어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실정이다. 학과 내 극동학 프로그램 운영 원칙은 한국학 및 중국, 일본, 인도, 동남아학의 균형 발전이라 정해져 있으나 이들 중국, 일본을 대표하는 기관과의 협력은 시간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현실이다. 실제로 이러한 추세가 지속된다면 한국학의 지위는 상대적으로 위축될 수 밖에 없으며 심지어 동북공정 논리의 보편화나 과거사 왜곡의 정당성이 폴란드인들의 의식 속에 자연스럽게 자리잡게 되는 대단히 위험한 상황이 전개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필자의 견해로는 야기엘로니안대학교에 지역학으로서의 한국학이 존재하는 가장 큰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본다. 과거 중국과 일본의 존재만으로 대변되어온 동아시아에서 한국은 이제 무시할 수 없는 실체로 부상했다. 세계사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경제성장과 민주주의의 실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불과 한 세대 만에 잡아냈으며 한류로 상징되는 한국의 대중문화는 아시아 국가 곳곳에서 더욱 세차게 소용돌이 치고 있다. 유사한 역사적 배경을 지닌 폴란드인들이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한국에 더 큰 애착을 가지지 못할 이유가 하등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폴란드의 심장인 크라쿠프에서 당당히 동아시아의 중요한 부분을 점유하고 있는 한국의 올바른 이미지를 심는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야기엘로니안대학교에 한국학의 씨앗이 뿌려진 지 이제 2년이 지났다. 지난 시간 동안 이곳에서 한국학의 정착과 한국에 대한 관심 제고를 위해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경주했다. 극동학 프로그램에 포함된 다른 과목들에 뒤지지 않기 위해 차별화된 강의 운영에 힘써 왔고 한국영화 상영과 특강 등 교과 외의 활동도 꾸준히 전개했다. 또한, 올해 5월에는 크라쿠프 최초로 ‘한국의 날’ 행사를 학과 주관으로 성공리에 치러내기도 했다. 하지만 야기엘로니안 대학교에서 한국학이 완전히 자리잡기 위해 헤쳐나가야 할 길은 아직도 멀다. 지난 2년 간의 시간 동안 극동학이라는 숲 속의 한국학이 맹아기를 거쳐 왔다면 앞으로 몇 년간은 실한 묘목으로 가꾸어져야 할 형성기가 될 것이다.
폴란드인들의 정신적 수도인 크라쿠프에, 폴란드 최고의 교육기관인 야기엘로니안대학교에 한국학의 뿌리가 굳건히 내리도록 하는 것, 이것은 하나의 도전이다. 한국과 폴란드 양국의 미래를 위한 희망찬 도전인 것이다. 그러기에 날로 높아가는 학생들의 관심과 열의를 피부로 느끼면서, 반드시 성취해낼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희망의 끈을 다시 한 번 질끈 쥐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