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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지 않은 역사의 무게, 흥미로운 문화 -

서울에서도 도쿄, 방콕, 타이베이 같은 아시아의 다른 대도시와 비슷한 도시 풍경을 볼 수 있기는 하지만, 서울은 확실히 고유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이곳은 거리도 더 넓고 건물도 더 크고 높으며,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도시의 역동적인 존재감이 느껴진다. 나는 서울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어떤 친숙함 같기도 하고, 미지의 에너지 흐름 같기도 한 그 무언가가 전하는 흥분을 만끽했다. 서울에는 한국의 수도라는 현대적인 상징 외에도 다른 많은 것이 담겨 있다. 예를 들어 어느 곳에서 봐도 눈에 들어오는 아름다운 산들이 있다. 고향 교토가 생각나게 하는 이런 산의 풍경은 내게 많은 위안이 되었다. 도시의 중심부로 들어가도 산들은 늘 가까이 있었으며, 서울의 도시 풍경에 특별한 정취를 보태주었다. 시내 중심의 마치 언덕 같은 곳에 작은 전통 가옥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 듯 자리한 모습을 보며 나는 현대적인 도시와는 대비되는 이 독특한 풍경에 매료되었다.



한국 그리고 한국의 문화와 처음으로 의미 있는 만남이 이뤄진 것은 약10년 전의 일이다. 새천년을 맞이하던 그 해 나는 런던에서 한국인 여성을 만났고, 우리는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다. 바쁜 대학 생활 중 우리가 나눈 시간은 사실 얼마 되지 않았지만 매우 강렬했다. 그 친구가 런던을 떠나던 날이 지금도 뚜렷하게 기억난다.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나는 다른 친구들과 함께 거리에 있었다. 그녀가 히드로 공항으로 가는 차에 올라탄 순간, 슬픔이 밀려왔다. 그런 것이 다 순리라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그녀가 멀어지자 통제할 수 없는 눈물이 자꾸 흘러내렸다. 어떻게 설명해야 해야 좋을지 아직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녀를 한 인간으로서 매우 존경한다. 서로 다른 곳에서 살고 있더라도 항상 그녀가 아주 가까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큰 도전이나 어려움에 직면할 때마다 그녀의 지지와 격려가 떠오른다. 그 뒤로 나는 내 친구를 길러낸 문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언젠가 직접 그 문화를 체험할 수 있길 소망했다.
그 후 일 때문에 두어 번 짧게 한국을 방문해 한국의 예술가와 큐레이터들을 많이 만났다. 짧은 방한 동안 한국의 문화는 내 몸의 모든 감각을 자극했다. 내가 경험한 것은 어느 특정한 나라의 문화라기보다는 내가 좋아하고 존경한 사람들의 문화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의 긍정적인 인상은 계속 이어졌다. 그랬기 때문에 한국국제교류재단으로부터 3개월간 연구 체류 기회를 얻게 되었을 때 너무 기뻤다.
나는 휴대전화 문화에 대해 몇 년 동안 연구하면서, 그리고 그것이 전 지구 차원에서 사회적, 개인적으로 미친 커다란 영향에 대해 알게 되면서 신기술이 사람들의 문제, 소통, 환상 등을 다루는 방식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예술 평론가이자 연구자인 나의 관점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도의 기술을 사용할 수 있고, 그런 기술이 일에 대한 우리의 사고방식을 바꿔놓는 지금, 사람들이 이미지 생산의 현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궁금해졌다. 나는 이 질문을 프로페셔널리즘과 아마추어리즘 사이의 경계가 불분명해지는 극적인 변화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했다.
‘아마추어’는 긍정적이면서도 부정적인 의미를 동시에 지닌다. 아마추어는 ‘독자적이고’, ‘부패하지 않으며’, ‘윤리적으로 건전하고’, ‘색다르며’, 그 무엇보다도 ‘혁신적’으로 즉각 받아들여지는 모든 것을 대신했다. 탈지역화된 기술의 발달, 전자제품과 유통 및 네트워크의 광범위한 보급으로 인해 아마추어의 의미는 갈수록 모호해졌다. 오늘날 그것은 일상의 모든 부분에서 발견된다. 기술은 새로운 매체, 서로 다른 간섭이 일어나는 새로운 조정의 공간을 만들어냈다. 어마어마한 ‘사용자’ 집단이 통합된 생산 수단이 생겨난 것이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권한을 부여하고, 스스로를 조직하면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이러한 새로운 현실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고 있으며, 우리 삶에 이것이 어떻게 반영되는지를 연구하면서 3개월간의 체한 기간 동안 나는 40명이 넘는 이론가, 예술가, 큐레이터, 기타 문화계 종사자 및 학생들과 인터뷰를 했다. 모든 인터뷰는 매우 통찰력 있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주었다.
나는 10년 넘게 조국 일본을 떠나 유럽 여러 나라에서 학업과 연구 및 큐레이터 활동을 했다. 유럽 사회에서 나는 아시아 여성으로서 항상 비영국인, 비스웨덴인, 비독일인, 비 EU시민 등 배제에 의한 ‘타자’로 자리매김되었다. 하지만, 내가 짊어지고 가야만 하는 이런 ‘비(非)’ 상황은 사물을 원래대로 보는 자세를 갖게 해주었고, 사람들을 원래 모습 그대로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인터뷰를 하는 과정에 거의 매번 언급할 필요가 있었던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일본의 한국 강점기와 나의 모국이 한국 사람들에게 가한 엄청난 비극에 관한 것이다. 나는 일본이 역사적 빚을 인정하는 면에서 크게 부족함이 있다는 것과 일본이 저지른 일이 엄청난 과오였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런 과거에 대해 유감스럽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진심으로 표현하는 것 외에 더 이상의 말은 찾아낼 수 없었다.
한국에 체류하는 동안 나는 일본인인 내가 한국에 왜 왔는지 물어보는 질문을 서너 차례 받았다. 개인적으로 내가 문화와 국가의 시각을 어떻게 해체하려고 했건 간에 두 나라 사이에 있는 무거운 역사의 무게가 항상 느껴졌다. 이토록 강하게 나 자신의 국적과 대면한 적이 없었다.
어느 날 나는 여러 차례 심사숙고한 끝에 가장 친한 친구에게 나의 이런 고군분투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이런 이야기가 우리의 소중한 우정에 상처를 줄까 봐 걱정되었지만 그녀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나의 무력감을 말할 수 없었다. 내 이야기를 들은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사람들은 항상 이런 이야기를 처치 곤란한 문제처럼 얼버무리지. 안 그래?” “맞아.” 나는 짧게 대답했다. 그녀의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안도의 마음이 들었다. 그것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웃으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나도 너를 만나기 전까지는 일본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어.”
나는 한국인과 일본인의 관계가 구체적인 경험을 통해서 언젠가는 역사의 굴레에서 벗어나길 바란다. 가해자 쪽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게 훨씬 쉽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전적으로 서로 다른 견해가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이해한다. 그러나 어쨌든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과거 역사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서로가 필요하다. 내가 첫걸음을 뗄 때 친구를 필요로 했고, 마찬가지로 친구도 그러했듯이 서로의 노력 없이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