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하늘의 초승달은 푸른 하늘에도 뜬다:
터키와 위구르
친족관계의 역사
위구르 역사문화 연구가
송호림(Alimjan)
수년 전 한국에서 유학중인 위구르 학생과 점심을 먹을 때이다. 옆자리 손님이 이 학생의 유창한 한국어 실력을 보더니 반갑게 말을 걸었다. “어느 나라 사람인데 그리 한국(어) 발음이
좋아요?”그러자 압둘이란 이름의 그 친구는 상대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터키 사람입니다.”둘 사이의 사소한 몇 마디가 끝나자마자 문득 이 친구의 국적이 정말 터키인지 궁금해졌다. (실제로
터키에 사는 위구르인도 상당히 많다) “압둘, 왜 본인을 중국이 아니고 터키사람으로 말해요? 국적이 터키였어요?”그러자 압둘은 답답한 듯이 옆에 있던 냉수를 한 모금 들이키고선 입을
열었다.
“아니요... 어차피 (한국에는) 위구르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많아요. 중국이라고 하면 ‘중국인이 그렇게 생겼어?’라는 귀찮은 질문이 와요. 그렇다고
‘투르크(돌궐)’사람이라고 할 수도 없어요. 지금 투르크라는 나라는 없으니까 그냥
터키라고 말해요.”
한국에 체류하는 위구르 사람들은 대부분 유학생이고 그 숫자도 십수 명에
불과하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수가 많은 터키, 우즈벡, 카작 등 다른 투르크계 체류자들에 비해 우리가 ‘위구르’사람을 직접 마주할 기회는 흔치 않다. 그러나 내가 만난 대다수 위구르 사람들은 압둘과 마찬가지로
그들 자신을 중국인보다는 터키인으로 소개하곤 했다. 물론 그 이유를 물을 때마다 각자의 사연이 조금씩
달랐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그들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진정한 조국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었다.
위구르족 인구는 중국 내 소수민족 가운데 다섯 손가락에 들 정도로 많다. 또한 신장위구르지역은 어떤 중국의 성(省) 혹은 자치구보다 넓다. 그러나 신장의 다른 투르크계 민족들과 달리
위구르족은 민족 고유의 국가공동체에 기댈 수 없는 유일한 과계민족(跨界民族)에 속한다.[1]그들은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터키, 호주
등지에 크고 작은 규모의 이민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지만 정작 어려울 때 기댈만한 모국 ‘위구르스탄’이 없다. 그들의 여권에 새겨진 한어병음식 성명은 실제 위구르식 이름이
가진 발음, 의미와 일치하지 않는다.[2]그들은 한족과는 한어로 말하지만 동족끼리는 모어인 위구르어로 대화한다. 그들은 중국 최대의 축제인 춘절과 중추절 대신 노루즈 바이람, 로자
헤이트, 쿠르반 헤이트를 지낸다.[3]그들은 한족의 음식을 불결하게 생각하여 되도록 먹지 않고 한족 문학, 음악, 미술에도 크게 관심이 없다.
사진1위구르족의 독립운동을 상징하는 아이-율두즈(ay-yultuz),
즉 초승달과 별 문양은 근대 오스만제국으로부터 파생되어 동투르키스탄 공화국의 국기로도 사용된 바 있다. 라마단 무렵 밤하늘에 떠오르는 초승달을 상징하는 아이-율두즈는 터키와
위구르만 아니라 다른 이슬람 국가들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터키와 위구르만큼 서로 닮은꼴은 찾아보기
어렵다.
에르도안, 사상 최초로 신장 땅을 밟다
2012년 4월 당시 터키 총리직에
있던 레젭 타이이프 에르도안이 우룸치를 방문하자 그를 보기 위해 거리로 쏟아진 수백의 인파는 이 같은 위구르족의 곤궁한 처지를 반영하고 있다. 에르도안은 당시 터키의 국가수반으로서는 역사상 처음으로 신장 땅을 밟았다. 동코우룩
시장(döngköwrük baziri; 二道桥)에서 멀찍이 에르도안을
지켜봤다는 한 중년의 위구르족 남성은 그 광경이 마치 ‘술탄을 맞이하는 (오스만) 백성들 같았다’고 회상했다. 당시 수행단에
참여했던 한 터키인 역시 ‘어느 투르크계 민족도 총리(에르도안)에 대해 이 정도의 사랑과 애착을 보여준 적이 없다’고 평가했다. 에르도안은 신장자치정부 관리들에게 떠나기 전 이런 말도 남겼다. “내 친족들을 그대들에게 맡기겠소.”당시 에르도안의 방문으로 양국 정부가 맺은 협정 가운데 의미심장한 하나는 터키가 카쉬가르 근방에 위치한 마흐무드 카쉬가리(Mehmud Qeshqiri) 묘역복원사업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위구르
사람이라면 코흘리개 어린아이부터 백발의 노인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는 大학자 마흐무드 카쉬가리는 위구르만이 아닌 모든 투르크 민족의 영웅이기도 하다. 이러한 역사인물을 위한 기념사업은 신장 자치정부의 몫이지 천리만리 떨어진 터키의 책무는 아니었다. 하지만 투르크 세계의 부흥을 꿈꾸는 ‘술탄’에르도안은 자칫 내정간섭으로 비칠 수 있는 민감한 사안에 선뜻 나섰던 것이다.
사진 2A, 2B우룸치에서 위구르인들을 만나는 에르도안의 모습(위) 마흐무드 카쉬가리 묘역 본관에 걸린 카쉬가리의 초상(아래). 터키정부의 노력 덕에 카쉬가리의 묘역은 머지않은 곳에 위치한 카라한의 무슬림 군주 술탄 사툭 부그라 한(Sultan Sutuq Bughraxan), 역시 카라한의 대학자였던 유숲 하스 하집(Yüsüp Xas Hejip), 중세 동투르키스탄의 영적 지도자 아팍 호자(Apaq
Xoja)의 묘역들보다 훨씬 관리가 잘되어 있고 규모도 크다.
에르도안은 다른 투르크계 CIS국가들의
수반들과는 대조적으로 공산당으로부터 파생된 정치적 배경이 없다. 그 자신부터 독실한 무슬림인 에르도안은
정치경력의 시작부터 현재까지 이슬람과 함께하고 있다. 자연히 중앙아시아에서도 독실하기로 소문난 위구르족에게
에르도안은 더 없이 이상적인 지도자가 된다. 세계위구르대회(Dunya
Uyghur Qurultiyi; World Uyghur Congress) 전 의장 레비야 카디르(Rabiye
Qadir)는 비록 망명 위구르인 사이에서 큰 지지를 받고 있으나 신장에서는 별다른 호응이 없다. 그녀
역시 다른 망명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중국정부로부터 테러리스트로 낙인찍힌 까닭에 그녀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구금될 수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정교일치적 성격이 짙은 이슬람세계에서 근본적으로 여성이 지닌 정치력의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신장 투르판에 체류했던 유대인학자 루델슨은 위구르 사회에서 히틀러가
이상적 지도자로서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기현상을 목격하며 그 원인을 근대 이후 뚜렷한 카리스마의 민족지도자가 등장하지 못한 탓으로 보았다.[4]그러나 최근에는 히틀러의 자리를 에르도안이 대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2009년 7.5 우룸치
사건 당시 중국정부의 무력시위진압을 ‘민족학살’로 규정하며 강력규탄한
점이나 2015년 6월 중국에서 동남아로 탈출한 위구르 난민의
터키행을 적극 추진하면서 중국 외교부와 마찰을 빚은 사건은 당국의 정보통제에도 암암리에 소문이 퍼져 있다. 실제로
터키 중부의 카이세리(Kayseri)에는 신장에서 탈출한 2천 5백명 이상의 위구르 난민들이 에르도안 정부의 보호 하에 거주하고 있으며, 태국과
말레이시아에 여전히 억류되어 있는 소수의 위구르 난민을 구하기 위한 터키 외교부의 지난한 노력도 계속되고 있다.[5]
1995년 7월 28일, 위구르 독립운동의 아버지 이사 유숲 알프테킨이 세상을 떠나기
수개월 앞서, 이스탄불시 술탄아흐멧 지구 내에서 성대한 공원 개관식이 열렸다. 당시 터키 대통령, 총리, 국회의장
등 내로라하는 정치인들이 개관식에 축전을 보내왔고, 이스탄불 시장이었던 에르도안은 직접 이에 참석해
의미 있는 기념사를 낭독했다.
“동투르키스탄의
위대한 지도자에게 무한한 감사의 뜻을 표현하고자 지금부터 이 공원을 ‘이사 유숲
알프테킨 공원’으로 명명합니다. 이제 거의 95세에 이른 이사 유숲 알프테킨은 단지 동투르키스탄을
위해서만 그의 평생을 바친 것이 아닙니다. 그는 투르크 세계 전체를 위해 일생을 바쳤습니다. 이사 유숲 알프테킨의 지칠 줄 모르는 투쟁 덕분에, 그는 우리에게만
영감을 주는데 그치지 않고 투르크 세계의 독립, 정의, 그리고
평화의 상징으로 거듭났습니다. [...] 동투르키스탄은 단지 투르크 민족의 고향이 아니라 우리 역사, 문명, 그리고 문화의 요람입니다.
이를 잊는 것은 우리 자신의 역사, 문명, 문화에
무지한 것입니다. [...] 동투르키스탄의 순교자들은 바로 우리의 순교자들입니다. 그들을 영원히 기억하고, 그들의 영혼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이 기념비를
동투르키스탄 순교자들의 무덤에 바칩니다. 그들의 투쟁은 언제나 기억될 것입니다. 오늘날 동투르키스탄 사람들은 조직적으로 중국화 당하고 있습니다. [...]”[6]
사진 3A 3B 위구르 독립운동의 아버지
이사 유숲 알프테킨(Eysa Yüsüp Alptékin)[7]과 함께한 에르도안의 모습(위). 술탄아흐멧 지구 내의 이사 유숲 알프테킨의 공원(아래). 에르도안은 90년대 초반 이스탄불 시장으로 갓 정계입문한 정치신인이었고
알프테킨은 이미 잔뼈 굵은 위구르계 망명인사로서 터키인들로부터 깊은 존경을 받고 있었다. 당시 중국
외교부는 공원설립에 문제를 제기했지만 터키 정부는 외국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이 장소(술탄아흐맷 지구)에 위구르 독립운동의 기념비를 세웠다.
그렇다면 위구르와 터키 사이의 끈끈한 유대감은 정확히 언제, 어디서부터 형성된 것일까. 단순히 투르크 언어, 문화적 배경으로만 보면 이의 정확한 시기를 특정하기 어렵다. 따라서
두 민족 사이의 구체적인 외교관계를 따져보면 1864년 신장에서 발발한 무슬림 반란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우즈벡 피스켄트(Piskent) 태생의 야쿱 벡(Muhemmed Yaqub; Yaqub Beg, 1820~1877)은 60여명의
코칸드 전사를 이끌고 혼란스러운 카쉬가르에 당도한다. 그는 현지의 혼란을 틈타 분열되어 있던 무슬림
반란세력과 신장의 청군들을 모두 제거하는데 성공, 불과 5년
만에 동투르키스탄 전역을 통일한다. 하지만 그의 후원자이자 코칸드 한국(qoqand xanliq)의 실질적 지배자였던 알림 쿨리(Alimqul;
Alim Quli)가 1865년 러시아군에 맞선 타쉬켄트 방어전에서 전사하고, 토착종교귀족 호자(Xoja)들까지 축출되면서 내외부의 민심이 흔들림을
느낀다. 그는 칭기스칸의 혈통도, 호자일족처럼 예언자의 후손도
아닌 일개 안디잔인(enjanliq)[8]에 불과했기 때문에 단순히 이교도로부터 무슬림을 해방시킨다는 명목만으로
현지인들을 다스릴 명분이 없었던 것이다.
동투르키스탄, 술탄의 속령이 되다
결국 야쿱 벡이 택한 방법은 당시 이슬람 세계의 맹주였던 오스만 제국에 신복(臣僕)하는 것이었다. 이미 코칸드와 동투르키스탄 성지순례객들의 숫자는 19세기 들어 8만 명에 육박할 정도로 그 수가 많았고, 이스탄불에는 투르키스탄 순례객을 위한 휴식처도 존재했다.[9]야쿱 벡의 출신국이었던 코칸드 한국 역시 무함마드 알리 한(Muhemmed Ali Xan, 1822~1842) 치세에 벌써 오스만 제국과 사절을 교환하고 있었다. 술탄을 알현한 야쿱 벡의 사절 역시 애초 알림 쿨리의 명으로 사신단을 꾸렸으나 여행 도중 코칸드 한국이 무너지자
그 소속이 바뀐 것이었다.
1867년 술탄을
처음 알현한 야쿱 벡의 사절단은 “이교도에 맞서 동투르키스탄의 무슬림을 지원해줄 것”을 요청한다. 처음에 오스만 정치인들은 먼 이교도 땅의 신생 이슬람국을
지원하는 일에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1871년 재상 알리
파샤(Ali Pasha)의 죽음으로 탄지마트 집단이 몰락하자, 술탄
압둘아지즈(Abdülaziz)는 추방된 청년오스만단(Yeni
Osmanlılar)을 불러들였는데, 이들은
제국의 회생을 범이슬람적 연대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윽고 오스만 집권층에서 중국 무슬림(xitay musulmanliri)들이 처한 운명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야쿱 벡의 아미르국이 여섯 번에 걸쳐 사절단을 파견하면서 양국 간의 정식 외교관계도 수립된다.
술탄 압둘아지즈는 야쿱 벡을
자신의 봉신으로 임명하고 보병, 포병, 기병을 담당할 제국군
훈련교관과 함께 비록 소량이지만 근대식 소총, 대포 등의 군사물자를 수차례 보낸다. 이처럼 전(全)이슬람세계의
통치자로부터 정당성을 인정받은 야쿱 벡의 성전(聖戰)은 그렇게
순조롭게 마무리되는 듯 보였다. 하지만 1877년 이미 섬서와
감숙 지방의 퉁간 반란을 성공리에 진압한 좌종당(左宗棠)의
청군이 물밀듯 밀려오기 시작했다. 게다가 악수에서 청군에 맞설 준비를 하던 야쿱 벡이 급사하면서 느슨하게
연결된 오스만과 위구르 사이의 외교관계도 흐지부지 끝나버린다. 당시 아미르국의 군대를 돕기 위해 파견되었던
터키인 군관들은 도망치거나 포로로 잡혀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겨우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10]
사진 4아팍 호자의 영묘(Apaq Xoja Maziri). 카쉬가르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에게 보통 향비묘로 잘못 알려져 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야쿱 벡은 이 성스러운
장소에서 술탄의 이름으로 후트바(금요설교)를 행하고 일백
발의 예포를 쏘는 성대한 즉위식을 거행함으로써 정식으로 동투르키스탄의 아미르(emir)로 등극했다. 그가 이 장소를 택한 이유는 동투르키스탄에서는 아팍 호자가 예수그리스도(Hazrat
Eysa)에 버금가는 존경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위 사진은 영묘에 딸린 마스지드(méchit)이며 아래는 아팍호자의
영묘 본관이다. 송호림ⓒ
야쿱 벡의 허무한 죽음 이후 터키와의 관계에 재차 불을 지핀 것은 반세기가 훌쩍 지난 뒤였다. 아투쉬(Atush)[11]출신의 부르주아 상인이었던 후세인 무사바요프(Hüseyin Musabayof,
1844~1926)와 그의 동생 바우둔 무사바요프(Bawudun Musabayof,
1851~1928) 형제는 해외무역과 성지순례의 과정에서 접한 이스마일 가스프린스키(Ismail
Gasprinski)의 범투르크주의 사상에 흠뻑 매료된다. 유년 시절 이미 야쿱 벡의 아미르국이
허망하게 무너짐을 목격한 그들은 이슬람 이상의 해결책을 쫓던 것이다. 이윽고 형제는 1885년 아투쉬 근교에 최초의 신식학교를 세우면서 유능한 학생들에게는 해외유학의 경험을 제공했는데, 선택된 유학지 역시 범투르크주의가 확산되던 이스탄불이나 카잔이었다. 1913년에는
무사바요프 형제의 사절단이 오스만의 내무부장관이자 열렬한 범투르크주의자였던 마흐메드 탈라트 파샤(Mehmed
Talat Pasha)에게 근대교육을 담당할 정식교사를 요청한다. 이에 따라 청년투르크단(Jön Türkler)의 일원인 아흐메드 케말(Ahmed Kemal)이 신장에 파견되었다.
사진 51995년 건립된 무사바요프 형제의 동상. 동상
하단에는 위구르 문자로 ‘위구르 근대
교육의 설립자들(Uyghur yéngiche ma'aripining asaschiliri)’이라는 표식이 붙어 있다. 이
동상은 형제의 출생지이자 최초의 신식학교(1885년)가 세워진
上아투쉬(üshtin atush) 익삭(yiksaq) 마할라에 있다. (2018년 현재는 정부에 의해 철거되어 찾아볼 수 없음) 무사바요프
형제의 학교는 위구르 최초로 서양식 축구를 가르친 것으로도 유명한데, 지금도 중국 최고의 유소년 축구팀은
모두 신장에 있다. 송호림ⓒ
1908년의
청년투르크 혁명 이전에도 오스만 정부는 1902년에 이미 중국 무슬림들의 성지순례를 지원하고자 청에
사절단을 보낸 바 있었고, 이러한 제국의 외교적 노력은 베이징의 퉁간족(回族) 거주지였던 니우지에(牛街)에 이슬람 학교(madrasa)를 설립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범이슬람주의적 취지에 한정된 것이었다. 하지만
무사바요프 형제의 계몽운동(usuli jadid)은 위구르족에게 그 이상의 의미와 형식을 부여했다. 카쉬가르에 세워진 케말의 학교에는 성월기가 펄럭였고, 그의 위구르
학생들은 오스만식 터키문자(Alibfa-yi Turkī)를 익혔다. 또한 케말은
학생들에게 제국 군가를 암송케 하면서 오스만 궁정의상을 본뜬 교복을 입혔으며, 범투르크주의와 계몽운동을
찬양하는 연극을 기획하기도 했다. 즉 아흐메드 케말로부터 교육받는 학생들은 언어부터 정신, 옷매무새까지 오스만의 신민으로 규정된 것이다. 이러한 신식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훗날 범투르크-이슬람주의를 넘어 위구르 고유의 민족주의를 발전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같은 해(1913년) 카쉬가르와 더불어 가장 많은
위구르족이 거주하던 신장 북부의 굴자(Ghulja; 伊宁)에서
성대한 축제가 벌어진다. 범투르크주의를 몸소 실천하던 오스만의 대장군 엔베르 파샤(Enver Pasha)가 에디르네(Edirne; Adrianople)를
수복했다는 전보가 이역만리 떨어진 신장에까지 날아든 것이다. 이미 위구르족은 발칸전쟁(1912~1913)에 휘말린 제국을 돕고자 4천 루블의 성금을 모아
제공한 바 있었는데 이는 최근 기준으로 환산하면 2~3억원에 달하는 거금이었다. 게다가 제국의 영사관 개설을 빙자해 기금을 걷는 사기꾼도 횡행했을 정도로 위구르족의 제국에 대한 연대감은 남다른
것이었다.
터키 공화국, 고립주의를 선언하다
그러나 1921년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제국이
해체되면서 범투르크주의의 핵심 집단이었던 청년투르크단은 망명자 신세로 전락한다. 이후 한 가닥 희망을
잡고 서투르키스탄의 바스마치(Basmachi) 운동에 뛰어든 대장군 엔베르 파샤마저 1922년 전사하면서, 투르크 세계의 범투르크주의 운동은 세속적 터키
공화국의 출현과 함께 자연스레 막을 내린다. 군주제를 무너트리고 민주공화국을 설립한 새 지도자 무스타파
케말은 오래 전부터 범투르크-이슬람 사상을 허황된 것으로 여겼고 엔베르 파샤와도 극렬히 대립했으며 터키인의
독자적인 민족주의를 국가회생의 묘안으로 생각했다. 자연히 케말의 집권시기부터 터키는 그간 중앙아시아에
펼쳐오던 다양한 범투르크주의 사업으로부터 발을 뺐으며, 1933년 카쉬가르에 동투르키스탄 이슬람 공화국(Sherqiy Türkistan Islam Jumhuriyiti,
1933-1934)이 선포됐을 무렵에도 터키
외교부는 이와의 관계를 일절 부인했다. 당연하겠지만 소련의 후원을 받는 볼셰비키 위구르들에 의해 세워진
제2차 동투르키스탄 공화국(Sherqiy Türkistan Jumhuriyiti, 1944-1949)에서 역시 터키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1930년대 위구르 군벌이었던 호자 니야즈(Xoja Niyaz Haji)가 터키인 부관을 대동하고 있었다는 확인할 수 없는 소문만 있었을 뿐이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터키 공화국은 1만 5천명 이상을 신속히 파병했고 한반도에 밀려오는 인민해방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그러나 이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해 제국 시절부터 끊임없이
위협을 가해온 소련을 견제하기 위한 고육책이었을 뿐이다.
1949년 9월, 베이징에서 열릴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에 참여코자 비행기에 오른
제2차 동투르키스탄 공화국의 지도자들 전원이 의문의 추락사고로 사망한다. 같은 해 12월, 마오쩌둥이
재빨리 인민해방군을 신장에 진주시키면서 동투르키스탄 공화국은 외교권이 없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소수민족자치구로 전락한다. 이때부터 터키에는 위구르 망명자들이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고, 1952년에는
동투르키스탄 이슬람 공화국 설립을 주도한 무함마드 에민 부그라(Muhemmed Imin Bughra)와
이사 유숲 알프테킨이 터키에 도착한다. 이들은 당시 터키의 외교부장관과 국회의장을 연달아 만나 더 많은
위구르 망명자들을 받아들일 것을 요청한다. 결국 1953년 3월까지 1천 8백 5십명의 위구르족이 터키에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한다. 1957년에는
알프테킨 스스로가 터키의 시민권을 획득하고, 이후 터키는 수천 명의 위구르 망명자들을 꾸준히 받아들인다. 특히 1959년 6백여명의
위구르족이 신장을 떠나 아프가니스탄에 머물며 새로운 안식처를 찾을 때, 알프테킨은 터키 총리 슐레이만
데미렐(Süleyman Demirel)을 설득해 1966년부터 67년까지 그 중 360명의 위구르인을 터키로 데려온다. 그러나 1970년대 터키와 중국 사이의 정식 외교관계가 수립되면서
이러한 노골적 집단망명은 다소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1990년대 중반까지 터키에 도착한 위구르인에게는 주거지와 함께 시민권, 그리고 병역의무(?)까지 제공되었다.
사진 6 위구르계 터키 장성 메흐멧 리자
베킨(Mehmet Riza Bekin, 1924~2010)의 사진.
1924년 호탄 출생인 그는 무함마드 에민 부그라의 조카로서 1938년 터키 정부의 초청을
받아 터키에서 군사교육을 받고 1950년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그는 1977년 준장으로 예편할 당시 “터키 군인으로서
나의 책무는 여기서 끝났다”고 선언한
뒤 죽을 때까지 동투르키스탄 독립운동을 위해 헌신했다.
위구르인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혔다”
그런데 최근 위구르 망명집단 사이에 ‘술탄’을 성토하는 목소리가 심심찮게 들리고 있다. 사실 알프테킨의 사후(1995년)
쏟아지는 중국의 압력 때문에 세계위구르대회를 비롯한 대다수 위구르 독립운동 단체들은 속속들이 터키를 떠나 새로운 활동거점을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수의 망명자들이 선택하는 최후의 도피처는 터키이다. 그런데 왜 갑작스레 위구르족 사이에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는 것일까. 에르도안이
예루살렘의 미국 대사관 이전에는 격분하는 반면, 정작 위구르족이
2009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혹독한 민족말살의 위기에 처했음에도 중국과 보다 밀착하면서 분리주의와 대테러 문제에서의 협력을
논하는 등 동족을 외면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로 2018년 4월에 있었던 양국 정상의 통화에서 에르도안과 시진핑은 국외의 테러리스트 궤멸에 합의했는데, 중국 입장에서 그들에게 위협적인 ‘테러리스트’란 현실적으로 위구르족뿐 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에르도안은 중국의 위구르탄압을 묵인하는 셈이 된다. 터키의 관영언론은 더 이상 위구르 문제를 대대적으로 보도하지 않으며 에르도안 스스로도 악화일로를 걷는 위구르
사태에 굳게 입을 다물고 있다.
그렇다면 이 같은 변심에는 어떠한 계기가 있었을까? 우선 2016년에 있었던 두 사건을 생각해본다. 첫째는 2016년 7월에
있었던 터키의 쿠데타이다. 터키 공화국 수립부터 일종의 관습처럼 반복되었던 군부쿠데타의 악몽이 에르도안의
집권시기에도 현실로 나타났다. 이로 인해 터키는 쿠데타의 배후로 의심되는 서방세계와 멀어지는 한편 중국·러시아와 관계를 돈독히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약 한 달이 지난 2016년 8월 지구 반대편에서는 티벳 당서기 시절 혹독한 탄압과
감시정책으로 악명을 떨쳤던 천취안궈(陈全国)가 새로운 신장위구르자치구
당서기로 부임한다. 그는 허난 출신의 한족 정치인으로 2011년부터
약 5년 동안 총인구 3백만에 불과한 티벳 전역에 7백개 이상의 감시초소 ‘피엔민징우잔(便民警务站)’을 세우면서 철저히 티벳족을 탄압했다.
그는 공산당 최고위층으로부터 티벳을 안정(?)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더 큰 시험대에 오르게
됐다. 바로 중국몽(中国梦)
실현을 위해 일대일로의 핵심지역인 신장에서 3대 惡으로 일컬어지는 ‘분리주의’‘(이슬람)극단주의’‘테러리즘’을 뿌리 뽑는 일이다.
술탄 없이 아미르만 가득한
투르크 세계
지난 6월에 있었던 대선과
총선에서 에르도안과 정의개발당(Adalet ve Kalkınma
Partisi)이 높은 득표율로 승리함에 따라
다수의 언론들은 이를 ‘21세기 술탄의 등극’으로 과장하는 모양새다. 그러나 술탄이란 이슬람 최고의 세속지배자로서 단순히 터키만이 아닌 전세계 무슬림들에게 그 권위를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제국 시절에 유효했던 술탄의 영향력은 당시에 비해 6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현 터키 공화국에서는 아무래도 요원한 꿈이 아닐까 싶다.[12]비록 오스만 제국이 한 때 전이슬람세계를 통합한 대제국이었으나 중국에까지
그 영향력을 미치기는 역부족이었다. 하물며 임박한 쿠르드족 분리문제만 대처하기도 벅찬 오늘날의 터키에서
“이교도에 맞서 동투르키스탄의 무슬림을 지원해줄”만한 여유가 있을까.
현재 중앙아시아의 다른 투르크계 국가들 역시 위구르를 돕기보단 당장의
경제적 파급력을 염려해 중국의 눈치를 보고 있다. (마치 우리가 사드보복에 보였던 소극적 태도처럼 말이다) 위구르에 비해선 훨씬 소수이지만 여전히 많은 수의 카작, 키르기즈, 우즈벡계 중국 무슬림들이 재교육수용소에 갇혀 있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수감자들 대다수가 중국 시민권자이기 때문에 마땅히 개입할 명분도 부족하다. 투르크계 민족국가는 아니지만
무슬림 종주국을 자처하는 사우디아라비아, 신장에 인접한 최대의 이슬람 국가 파키스탄 역시 정치·경제적 이유로 중국의 든든한 지원군으로 남아 있다.
오늘날 투르크 세계의 단결은 엔베르 파샤의 죽음(1922년) 이후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것 같다. 소련이 해체되면서 중앙아시아의 투르크계 국가들은 서로 힘을 합치는 대신 독자적 민족주의 노선을 추구해왔다. 마치 제정러시아가 투르키스탄을 침공하던 당시 서로 치열하게 다투던 소규모 오아시스 아미르들의 시대로 회귀한
모양새다. 그러나 부하라, 히바, 코칸드가 서로 내분하다 차례로 무너진 것처럼 위구르가 사라지면 어느 누구도 그 다음 차례를 예상할 수 없다. 인구 약 2천만의 국가가 14억의
인구를 가진 대국에 맞서는 것은 섬세한 외교술 외에는 마땅한 방법이 없을 것이다. 설령 그 2천만에 8천만을 더한다고 해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2억이 넘는 모든 투르크 민족들이 단결한다면 이야기는 사뭇
달라질 수 있다. 투르크 세계의 술탄은 에르도안 개인이 아니라 투르크 개개인 모두가 될 수 있다. 이제는 그들 조상이 남긴 옛 오르혼 비문의 구절을 상기할 때가 아닐까.